전 세계가 에너지 위기에 신음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나치게 낮은 에너지 가격도 에너지 낭비의 한 요인이다. 원유·가스·석탄 국제 가격이 폭등했는데도, 장기간 전기요금이나 기름 값을 눌러온 나머지 에너지 절감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원가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전기·가스요금 탓에 한전과 가스공사의 부실이 단기간에 눈덩이처럼 커지는 구조”이라면서 “에너지 가격 현실화를 통해 에너지 효율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픽=김현국

◇과소비 부추기는 싼 에너지 가격

15일 국제 에너지 가격 사이트인 글로벌페트롤프라이스닷컴에 따르면 올 3월 기준 우리나라의 주택용 전기 요금은 kWh(킬로와트시)당 126.4원으로 전 세계 148국 중 97번째였다. 우리보다 싼 나라는 러시아(102위), 사우디아라비아(116위) 같은 에너지 부국이 많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국 중에선 37위다. 튀르키예(109위) 한 곳만 주택용 전기요금이 우리나라보다 쌌다. 1위인 덴마크(669.5원)의 5분의 1에 못 미치고, 일본(315원)과 비교하면 40% 수준이다. 최근 1년 반 사이 이탈리아 전기 요금은 2배 이상으로 올랐고, 영국(89%)·스페인(45%)·독일(43%)도 가파르게 올랐다. 이 기간 우리나라의 인상률은 17.9%다.

중동·미국 등에서 전량 수입하는 천연가스 가격도 6월 기준 MJ(메가줄)당 17.98원으로 크게 낮은 수준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동북아 LNG와 유럽 천연가스 가격 역전 현상이 벌어지면서 스페인(62.8원), 독일(53.06원), 영국(51.07원), 프랑스(40.02원) 등 유럽 국가는 폭등했고, 미국도 28.57원까지 올랐다. 전쟁 발발 전인 작년 6월 미국과 영국은 우리와 비슷한 19원 수준이었고, 스페인·독일·프랑스도 20원대였지만, 국제 가격 급등에도 우리는 1년 내내 가격이 제자리다.

기름 값(휘발유·경유)도 마찬가지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이달 첫째 주 우리나라의 고급 휘발유 가격은 L당 1945.3원으로 가격이 확인되는 OECD 22국 중 20위다. 1위인 덴마크(2931.3원)는 우리보다 1000원 가까이 비쌌다. 유럽이 우리나라보다 기름 값이 비싼 건 세금이 많이 붙기 때문이다. 국제 가격이 폭등해 국내 기름 값이 오르면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도 기름 값에 붙는 세금을 깎아 주는 게 우리 정부의 고유가 대책이다. 기름을 많이 쓰는 나 홀로 큰 차 타는 계층이 가장 큰 혜택을 받게 된다. 정용헌 아주대 교수는 “지금 유가 수준은 2010년 가격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배럴당 60달러 미만으로 다른 물가와 비교하면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다”라며 “인위적으로 유류세 인하를 통해 가격을 낮추다 보니 오히려 큰 차를 더 선호하고, 경차는 시장에서 밀려났다”고 했다.

◇에너지 정책 변화 필요…취약층은 복지 측면에서 접근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해선 국제 에너지 가격에 맞춰 국내 가격도 움직이도록 해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요금 측면에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식경제부 차관을 지낸 김정관 에너지미래포럼 대표는 “지금까지 에너지 가격 정책은 산업·복지·물가 정책에 밀려 표류해왔다”며 “에너지 위기 국면에서 장·단기 수급 안정을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격 인상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성봉 숭실대 교수는 “1, 2차 오일 쇼크 이후 1980년 ‘에너지이용합리화법’을 만들고 에너지 절약에 나섰지만, 정작 가격 요소는 빼놓다 보니 에너지를 마구 쓰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다만 에너지 가격 인상에 맞춰 에너지 빈곤층에 대한 지원은 필수적이다. 조환익 전 한전 사장은 “한 번에 20% 이상씩 수차례에 걸쳐 올려야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서도 “에너지는 공공재 성격이 큰 만큼 저소득층과 뿌리 중소기업들 대상으로 요금 감면이나 지원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