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부산 강서구 녹산산단에 있는 원전 부품 업체 경성정기에서 직원이 제작 중인 퓨얼랙(fuel rack)을 보여주고 있다. 퓨얼랙은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설비다. ‘탈원전 폐기’를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 신한울 3·4호기 설비 및 원전 예비 부품 발주가 이어지며 부산·창원 지역 원전 업계에 온기가 돌고 있다. /부산=김동환 기자

지난달 31일 부산 강서구 녹산산단에 있는 원전 기기 전문 업체 경성정기. 1870㎡(약 565평) 넓이 제관 공장에선 가로 2.6m·세로 2.6m·높이 4.6m 크기 퓨얼랙(fuel rack) 6개에 대한 용접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퓨얼랙은 원전에서 전기 생산을 위해 4~5년 연소한 뒤 꺼낸 연료봉을 저장하는 설비다. 이 공장에서 만든 퓨얼랙은 내년과 2025년 차례로 상업운전을 시작하는 새울 3·4호기(옛 신고리 5·6호기)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수조에 설치된다. 이 회사 성남현 전무는 “지난 정부 때 신규 원전 관련 수주가 아예 끊겼을 때 그나마 인력 유지에 도움이 된 게 퓨얼랙이었다”며 “올해 상반기 신한울 3·4호기 사전 발주 물량 제작에 들어가면 고비를 넘기게 된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정책 폐기’를 국정과제로 내세우면서, 고사 위기에 처했던 부산·창원 지역 원전업계에 온기가 돌고 있다.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는 패배감이 팽배하던 1년 전과 달리, 이젠 “아직 어렵지만 그래도 버틸 만하다”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것 같다”는 현지 분위기다.

◇긴 터널 빠져나온 부산·창원 원전업계

1990년대 중반 상업운전을 시작한 전남 영광 한빛 3·4호기부터 원전 사업을 본격화한 경성정기는 2020년쯤부터 원전 분야 신규 수주가 뚝 끊기자 두 차례에 걸쳐 임직원 임금을 30% 삭감했다. 원전 분야 인력도 35명에서 15명으로 줄였다. 성남현 전무는 “임금이 대기업 3분의 1수준으로 떨어져 직원들은 대리운전을 뛰면서 버텼다”며 “다행히 지난해 하반기에 50억원가량 신한울 3·4호기 물량을 조기 수주하면서 최근에는 5년 만에 신입 직원도 뽑았다”고 했다. 창원 마산합포구 진북산단에서 만난 삼홍기계 김승원 사장도 “지난 정부 탈원전 영향으로 6억원까지 떨어졌던 원전 부문 수주액이 작년에는 24억원으로 늘었다”며 “주변 대학을 중심으로 전공자 채용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남 김해에 있는 세라정공의 김곤재 대표는 “재작년까지는 상황이 말도 못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요즘 분위기는 고무적”이라고 전했다.

원전 업계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원전 주요 설비를 제작하는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는 지난해 400여 협력업체에 1541억원 규모 물량을 주문했다. 아직 2000억원에 달한 박근혜 정부 당시에는 못미치지만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에 시동을 건 2017년과는 비슷한 수준이다. 2021년(769억원)과 비교하면 두 배를 웃돈다.

◇본격적인 매출은 아직…추가 일감 속도 내야

분위기는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 매출이 제대로 나오지 않다 보니, 업계에서는 주민 의견 수렴 작업을 진행하는 신한울 3·4호기 건설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봉규 원비두기술 대표는 “원전 주기기 같은 주요 설비는 규격이 명확히 확정되지 않으면 제작에 들어갈 수 없다”면서 “중소·중견 부품사 매출을 일으키기 위해선 하루빨리 사업 계약이 확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 정부 5년 동안 일감 절벽을 겪은 부산·창원 지역 원전 부품 업계에선 이른 시일 내에 윤석열 정부가 약속한 원전 10기에 대한 계속운전 허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업계에서는 배관, 밸브 등 노후 설비 교체 수요를 감안하면 원전 1기당 2000억~3000억원 정도 발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한수원이 지난해 고리 2·3·4호기에 대한 계속운전 허가를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신청했지만, 아직 허가가 나오지 않으면서 관련 발주도 묶여 있다. 업계에선 부품 업계 숨통을 틔우기 위해 18개월 정도 걸리는 심사 기간을 줄여 조기 발주를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가 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인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도 연간 1000억원씩 총 3000억원가량 원전 부품 업계에 일감을 더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종호 전 한수원 기술본부장은 “유럽·중동 등 해외 원전 수주를 따내고 이에 따른 부품 발주가 본격화될 때까지 업계 체력을 키우기 위해선 추가 일감이 필요하다”며 “신한울 3·4호기 외에도 원전 생태계 회복을 위해 계속운전, 건식저장시설 추진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