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식품업체 A사는 작년 연말 한 기관의 국내 상장사 대상 ESG 경영(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에서 최하 등급인 D를 받았다. 2020년부터 3년 연속 D등급이었다. 평가기관이 지적한 문제점은 해마다 달랐다. 2020년엔 사외이사 연임 기간이 길다는 점이, 2021년에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가 없다는 게 이유로 꼽혔다. 지난해엔 사외이사 임기도 줄이고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도 냈지만 내부거래 비율이 높다는 이유로 다시 D를 받았다. A사 관계자는 “평가 기준도 명확하지 않은 데다 평가가 다 끝난 뒤에야 미비점을 알려주니 대비가 어렵다”며 “이런 식이면 계속 D등급을 받으면서 기업 이미지만 나빠지고 수출까지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ESG 경영 확산에 따른 중견·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원자재·부품 조달부터 완제품에 이르는 생산 전 과정과 경영 전반에 대해 ESG 경영 준수 여부를 깐깐하게 따지는 것이 글로벌 표준이 되면서, 수출 대기업뿐 아니라 이들에 납품하는 중소·중견기업들까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특히 경기 둔화로 기업들의 실적 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ESG에 대응할 전문 인력과 자금이 부족한 중견·중소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줄 제도적 지원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용 부담·인력 부족, 중소기업 ESG 가장 큰 어려움
코스닥 상장사인 대전의 한 바이오 기업은 지난해 말 ESG 평가 전 부문에서 D등급을 받았다. 한 해 전 D등급을 받은 뒤 ESG 전담 팀까지 만들었지만 벽에 부딪혔다. 이사회 내에 ESG 위원회를 신설하려 했지만 주주들은 “주가도 시원찮은데 무슨 ESG냐”며 반대했다. 사회적 기여 점수를 잘 받으려고 의약품을 기부했지만 매출 대비 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제대로 점수를 받지 못했다. 회사 관계자는 “연구원이 많다 보니 장애인 고용도 적어 점수가 낮았다”며 “탄소 배출, 여성·장애인 고용 비율까지 챙겨야 하는데 일일이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경기도 화성의 한 반도체 부품 제조업체는 최근 2~3년간 ESG 경영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부담이 만만찮다. 정규직 비율을 높이려 2020년부터 비정규직을 모두 없앴고 2021년에는 5억원을 들여 공장에 폐기물 정화장치를 설치했다. 회사 관계자는 “비정규직을 쓸 수 없어 일손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일당 24만~25만원을 주고 외주 인력을 파견받는다”며 “이런 ESG 비용이 늘면서 수익성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고 했다. 이달 초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ESG 경영에 대해 설문한 결과, ‘비용 부담’(58.3%)과 ‘내부 전문인력 부족’(53%)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혔다.
◇국내외 ESG 평가도 확산
기업들이 대응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ESG 관련 글로벌 표준과 지침은 갈수록 촘촘하고 까다로워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11월 유럽 진출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업 지속 가능성 공시 지침’을 승인하고 회원국들이 내년부터 이를 시행하기로 했다. 유럽과 거래하거나 유럽에 지사를 둔 기업들은 ESG 경영 관련 내용을 공시하고, 협력 중소 업체들의 직원 인권 현황과 환경오염 실태까지 점검해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내에선 금융위원회가 2025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 2030년부터는 전체 코스피 상장사가 ESG 관련 사항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할 예정이다.
중소·중견기업들은 ”개별 기업 차원에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며 “정부·대기업이 구체적인 ESG 평가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부품 제조업체 관계자는 “산업부 등에서 ESG 가이드라인이나 자가진단 시스템을 내놓고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개별 기업들이 지켜야 할 사항들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 중소기업 ESG 담당자는 “대기업은 ESG 전담 인력을 둘 수 있지만 중소기업에선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한다”며 “중소기업을 위한 ESG 전문인력 양성에도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금융기관을 비롯해 여러 기관에서 각기 다른 기준으로 ESG를 평가의 잣대로 활용하는 것도 문제”라며 “ESG가 또 하나의 규제가 되지 않도록 정비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