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불모지로 여겨졌던 팹리스(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첫 번째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이 탄생했다. 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 파두는 “1조800억원의 기업 가치로 프리IPO(상장 전 지분 투자)를 마무리했다”고 27일 밝혔다. 파두는 예정보다 20% 많은 120억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유치하며 유니콘에 등극했다. 2월 기준 파두의 누적 투자액은 약 1500억원이다.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최대 강국이지만 세계 팹리스 분야에서는 1% 점유율에 그친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가 얼어붙은 상황에 국내 팹리스 유니콘이 탄생한 것은 그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 유니콘 기업은 22사다.

파두의 창업자 이지효(왼쪽)대표와 남이현 대표./고운호 기자

파두는 2015년 컨설팅 회사 베인앤드컴퍼니 출신 이지효 대표와 SK텔레콤 융합기술원에서 반도체 연구원으로 일한 남이현 대표가 세운 스타트업이다. 주력 제품은 데이터센터에서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이고 안정적인 전송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SSD(solid state drive·데이터 저장 장치) 컨트롤러다. 2016년 업계 선도 주자인 인텔이 파두의 시제품을 자체 연구소에서 검증한 결과, 인텔 동급 제품보다 성능이 2~3배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엔 글로벌 대기업들은 한국의 작은 스타트업이 첨단 부품을 대량 공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파두는 기업을 직접 찾아 생산한 제품의 기술력을 보여주며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코로나로 납품 일정을 못 맞춰 계약이 무산되기도 했다. 파두는 “우리 제품은 읽기·쓰기 성능은 물론 최근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저전력·저발열 측면에서 글로벌 최고 수준의 성능을 보이면서 글로벌 선도 데이터센터들을 중심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파두는 미국의 데이터센터와 메타(옛 페이스북)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파두의 경쟁력은 연구 인력에서 나온다. 파두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연구실 출신 인력이 주축이 돼 시작했다. 이후 경력 10년이 넘는 반도체 설계 분야 베테랑들과 삼성전자·SK하이닉스 출신 엔지니어들이 합류했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려면 세계 최고의 인재가 있어야 한다는 이지효·남이현 대표의 원칙 때문이다. 지난해 7월 170명이던 직원은 올해 2월 230여 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180명 이상이 엔지니어다. 파두는 “순수한 국내 인력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매출은 2021년(51억원)의 10배가 넘는 500억원대 후반을 달성했다. 영업이익도 약 40억원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올해부터 이익 실현이 본격화될 것으로 회사는 예상한다.

파두는 특례 상장을 위한 기술성 평가를 진행하며 IPO(기업공개)를 준비하고 있다. 종합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개발도 진행 중이다. 앞으로 데이터센터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반도체 제품군을 갖춰 2030년까지 매출 3조원 수준의 글로벌 팹리스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이지효 대표는 “그 어떤 스타트업도 양산급의 본격적인 매출을 창출하지 못할 시기에 세계 최고의 반도체 업체들이 겨루는 미국의 데이터센터 시장에 진출해 실제 사업 성과를 냈다”며 “이번 유니콘 등극은 시스템 반도체 스타트업 중 가장 먼저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