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연구·개발) 현금지원 방식은 너무 느리고 늘어집니다. 기술과제를 정하고, 사업자 선정까진 3년이 걸리는데 그동안에 세제지원 방식을 택한 다른 나라에선 이미 개발이 끝납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MWC 2023′에 참석한 정만기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은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전시장을 참관한 직후 기자들과 만나 “역량이 뛰어난 대기업은 세제지원, 중소중견기업은 현금지원으로 가는 게 맞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바르셀로나 현지에서 가진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정 부회장은 “우리나라는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세계 1~2위를 다투면서도 생산성은 낮다”면서 “이는 주로 현금지원에 정부 정책이 쏠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R&D 비중은 2021년 기준 4.96%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하지만 구체적인 성과에서는 다소 아쉬운 현실에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선 정부의 지원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정 부회장은 “정부가 기업의 R&D를 도와주는 방법에는 직접 현금을 주는 방법이 있고, 기업이 기술을 개발하면 세액공제를 해주는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현금지원을 주로 한다”면서 “다만 현금지원은 가끔 일어나는 비리나 부정 때문에 투명성을 강조하다 보니 과제 선정에 1~2년, 사업자 선정에 1년 정도 걸리면서 기술 개발 적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우리가 각종 절차에 발이 묶여 시간을 보내는 사이, 다른 나라 기업들이 발 빠르게 개발에 나서면서 정작 돈을 들여 개발했을 땐 이미 낡은 기술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조하다 보니 반도체 기술 심사에 철강이나 섬유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일까지 일어나면서, R&D 능력보다는 발표 잘하는 업체가 선정되는 경우도 일어난다”며 현실을 지적했다.
정 부회장은 “기업들이 무슨 과제를 할지 모르던 과거에는 정부 부처가 과제를 선정하는 방식이 효율적이었다”면서 “이젠 기업의 연구개발 역량도 커졌으니 서서히 바꿀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반도체 회사들도 세액공제를 받는다”며 “생산성이 높아져야 중국을 이기고 국제무대에서 이길 수 있다”고도 했다.
정 부회장은 이어 전시에 참여한 스타트업을 거론하며 “국내 스타트업 25%가 해외로 나가는 게 현실”이라며 “유럽에선 스타트업을 옭아매는 규제가 별로 없는데 우리도 스타트업이 번성하려면 규제가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협회가 지난해 말 국내 스타트업 256개사를 상대로 한 설문에서 ‘규제 때문에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는 응답은 4곳 중 1곳에 달했다. 글로벌 기업들까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유망 스타트업 M&A(인수·합병)에 나서고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가운데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무역협회의 관점에서 규제 개선 필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무역협회는 이번 MWC에서도 해외 진출 가능성이 큰 13개 유망 스타트업의 참가를 지원했다. AI(인공지능) 기반 글쓰기 연습 프로그램을 내놓아 올 CES에서 혁신상을 받은 뤼튼테크놀로지스를 비롯해 AI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인 이노크래틱테크놀러지스,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키 통합솔루션을 제공하는 참깨연구소, 불에 붙지 않는 이차전지를 개발한 코스모스랩 등이 주요 업체다.
한편 정 부회장은 이번 MWC에서 거세게 나타난 중국업체의 공세에 대해선 “현지에서 미팅을 가져보니 중국이 가격은 싸지만, 품질이나 브랜드 AS는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더라”며 “EU(유럽연합)가 추진하는 반환경, 반노동 규제가 결국 중국을 겨냥한 것인데 아무리 MWC에 나온다고 해도 그 같은 인식은 잘 바뀌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