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아연 제련 업체 고려아연을 둘러싸고 오랜 기간 동업을 이어온 영풍그룹 장형진 고문 집안과 최윤범 회장 집안의 지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그룹의 핵심 캐시카우인 고려아연의 계열 분리 가능성과 맞물려 촉발된 두 집안의 지분 싸움은 최근 종중 자금까지 동원되며 격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 회장 가문이 경영권을 쥔 고려아연이 그룹 지주사 역할을 하는 영풍과 한날 정기 주총을 열던 관행을 깨고 올해 주총 일정을 따로 잡아 이목을 끌고 있다. 그간 역대 주총에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왔던 두 가문이 11명의 이사진 중 6명을 새로 선임하는 이번 주총에서 어떤 갈등 양상을 표출할지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74년 동업 가문의 지분 경쟁… 종중도 지분 매입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설립한 영풍그룹은 고려아연 계열사는 최씨 일가가, 전자 계열사는 장씨 일가가 맡는 분리 경영을 해왔다. 하지만 창업주 3세 최윤범 회장 취임 이후 고려아연이 그룹에서 계열 분리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두 집안은 지난해부터 고려아연 지분 확보전을 벌여왔다. 고려아연은 그룹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캐시카우다.
고려아연 최대 주주는 장형진 영풍 고문과 ㈜영풍 등 영풍그룹이다. 하지만 고려아연은 지난해 LG화학, ㈜한화, 한국투자증권, 세계 2위 원자재 거래 기업 트라피구라에 자사주 지분을 잇따라 매각했다. 최윤범 회장 측에서 의결권 없는 자사주를 우호 세력에 매각해 우호 지분을 크게 늘린 것이다.
해를 넘겨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분 확보전에는 최씨 종중도 뛰어들었다. 고려아연은 지난달 27일 ‘해주최씨 준극경수기호종중’이 고려아연 주식 3만3905주를 약 201억원에 매입해 지분이 0.27%에서 0.44%로 늘었다고 공시했다. 이에 앞서 장형진 고문 측이 경영하는 에이치씨와 최 회장 측이 경영하는 유미개발도 서로 고려아연 지분을 매입했다. 현재 최 회장 측 지분을 모두 합하면 28.5%, 영풍 측(32.4%)과 차이가 3.9%포인트에 불과하다.
◇같은 날 주총 관행 깨고 따로, 거리 두기 평가 나와
두 가문이 지분 경쟁을 벌여온 가운데 오는 17일 고려아연 정기 주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주총의 주요 안건은 사내·사외·비상무이사 6명 선임이다. 이사 후보에 박기덕 현 고려아연 사장, 박기원 온산제련소장, 최 회장의 사촌인 최내현 켐코 대표가 포함돼 최소 절반이 최 회장 측 인사로 평가받는다.
그간 고려아연의 이사 선임 건은 이견 없이 통과됐지만 올해는 장 고문 측이 고려아연 측 이사 선임에 반대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최 회장과 장 고문의 이사회 임기가 내년에 끝나기 때문에 올해 이사진 구성이 향후 고려아연을 둘러싼 지분 및 경영권 경쟁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약 8%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가 될 수도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주총에서 장 고문의 과도한 겸직을 문제 삼으며 이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진 바 있다.
고려아연은 올해 주주총회 날짜를 ‘3월 17일 금요일’로 공시했다. 동업 경영을 이어온 영풍과 고려아연은 ‘3월 넷째 주 수요일 또는 금요일’을 주총 날로 정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1시간 시차를 두고 정기 주총을 이어왔는데 그 같은 관행을 깨고 한 주가량 먼저 주총을 여는 것이다. 고려아연은 “기존 날짜는 수퍼 주총 데이라 더 많은 주주가 주총에 참여할 수 있게 유도하는 동시에 이른 주총을 통해 배당금도 빨리 지급할 수 있어 날짜를 당긴 것”이라 했지만, 업계에선 “고려아연이 영풍과 거리 두기를 늘려가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