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지고도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으로 고사(枯死)할 뻔했던 한국 원전 생태계에 정상화 길이 열렸다.
한국수력원자력과 두산에너빌리티는 29일 경북 울진에 짓게 되는 신한울 원전 3·4호기에 들어갈 원자로·증기발생기·터빈발전기 등 핵심 기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계약으로 원전 산업계에 10년 동안 2조900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일감이 공급될 전망이다. 발주사인 한수원은 사업 초기 3년 동안 총계약의 절반인 1조4000억원을 조기 집행한다는 계획이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번 계약으로 그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원전 기업들이 다시 도약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정부는 연내 원전 생태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빠르게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10년간 2조9000억원 일감 공급
이번 계약은 이전 정부 5년간 탈원전 정책에 따른 일감 부족과 자금난으로 황폐화한 원전 업계에 새로운 피가 공급되면서 생태계 복원의 물꼬를 텄다는 데 의미가 있다. 국내 원전 업계에 이번처럼 대규모 발주가 나온 건 2014년 신고리 5·6호기 이후 9년 만이다. 주기기 제작에는 두산에너빌리티뿐만 아니라 국내 460여 개 원전 협력사가 참여한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올 2월까지 450억원어치를 선발주한 데 이어 올해 안에 2100억원 규모 물량을 추가 발주할 예정이다. 원전 부품업체 경성정기의 성남현 전무는 “지난해 하반기 50억원가량 조기 수주했는데 이번 계약에 따라 추가로 100억원 이상 수주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정연인 두산에너빌리티 사장은 “이번 계약으로 주기기 제작에 참여하는 원전 협력사 등 국내 원전 생태계 전반에 활력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이번 주 기기 계약은 올 1월 확정된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한울 3·4호기가 다시 포함되면서 가능해졌다. 환경부의 환경영향평가는 상반기에 마무리되고,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승인은 내년에 날 전망이다. 신한울 3·4호기는 애초 2022년과 2023년 말 상업 운전 개시 일정에 맞춰 부지 조성 작업을 진행했지만, 2017년 10월 문재인 정부가 신규 원전 건설을 백지화하며 사업이 무산됐다. 정부는 신한울 3·4호기에 대해 올 하반기 부지 정지 작업을 거쳐 내년 착공에 들어가 2032~2033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
◇ “문 정부 탈원전 대못 깊어”
탈원전으로 백지화된 신한울 3·4호기 건설이 재개됐지만 이전 정부의 탈원전 대못에 따른 손실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당장 다음 달 8일 고리2호기가 설계 연한(40년)이 끝나면서 앞으로 2년 동안 가동을 멈추게 된다. 고리 2호기는 추가 정비를 통해 10년 이상 더 활용이 가능한데도 이전 정부가 폐쇄를 결정하면서 운영 연장에 필요한 절차와 정비를 하지 않은 탓에 가동을 중단하게 됐다. 가동 중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21년 4월에 운영허가 연장 신청이 이뤄졌어야 했다. 산업부는 “고리 2호기를 중단하면 비싼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연간 11억7000만달러(약 1조5200억원) 추가 비용이 든다”고 했다. 고리 2호기가 2025년까지 2년 동안 가동이 중단되면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3조원에 달한다는 것이다.
또 내년부터 2029년까지 고리 3·4호기, 한빛 1·2호기, 월성 2·3·4호기, 한울 1·2호기 등 총 9기가 운영 허가 만료로 가동 중단이 불가피해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1년 가까이 걸린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나 앞으로 2년 이상 멈추는 고리 2호기 가동 중단은 탈원전 대못이 굉장히 깊어, 정책을 바꾼다고 한순간에 해결될 사안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