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려면 자산 매각 금액의 10%를 기부하고 떠나라.’ 최근 러시아 정부가 이 같은 방침을 밝히면서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고심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넘게 장기화하면서 적자는 커지고 시장 점유율은 급락한 가운데 사업 철수조차 힘들어진 것이다. 전쟁 발발 이전 러시아는 자동차·가전 등을 중심으로 한국의 10위 교역 대상국이다. 이런 사이 친(親)러시아로 분류되는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 내 점유율을 높여가며 우리 기업들의 경영난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 현대차 러시아 법인이 1년째 생산 중단과 공장 매각설이 나오는 사이 중국 디이자동차의 고급 브랜드 ‘홍치’는 러시아 시장 공략에 나섰다. 또 삼성전자·애플이 점하던 스마트폰 시장도 샤오미 등 중국 브랜드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러 “시장 가치의 최소 10% 놓고 떠나라”… 삼성·LG·현대차와 협력사들까지 골머리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 27일(현지 시각) 외국인 투자자의 자산 매각 관련 조항을 새로 공고했는데 ‘비우호국’ 국가의 투자자들은 사업체를 매각할 경우 시장 가치의 최소 10%를 ‘출국세’ 형태로 연방 예산에 기부해야 한다고 정했다. 러시아의 비우호국은 전쟁 발발 이후 대러 제재에 동참한 국가들로 우리나라도 포함된다.
이번 ‘10% 기부’ 조항으로 아직 러시아에서 철수하지 못한 기업의 앞으로 전략은 더 험난해졌다. 키이우경제대학 연구소에 따르면 러시아 진출 기업 3129사 중 1895개 기업이 사업을 중단하거나 규모를 줄였고 철수를 진행했다. 러시아 진출 32년 만에 사업체를 전부 매각한 맥도널드, 단돈 1유로에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모두 매각한 닛산자동차처럼 아예 법인을 매각하고 완전히 철수한 곳이 208사이고 사업을 중단한 기업은 456곳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에서 철수 승인을 대기 중인 외국 기업만 2000여 곳으로 이들 기업이 러시아 정부 승인을 받더라도 자산 매각 대금의 10%를 토해내야 한다.
◇韓 기업 과거 버티기 성공 사례 있지만
국내 주요 기업은 러시아 법인 공장 가동을 멈추거나 구조조정을 하면서도 철수는 하지 않았다. 현대차는 작년 3월 연 23만대 규모 시설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삼성전자도 법인은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현지 통신 업체는 삼성전자가 지난달 출시한 신형 플래그십 스마트폰 갤럭시23 시리즈를 제3국을 통해 우회하는 방식으로 병행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업계에선 러시아는 애초 시장 진입 자체가 쉽지 않은 데다 구소련 블록의 중심으로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까지 연결하는 시장이어서 한번 철수하면 재진입도 어려워 함부로 철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채무 지불 유예) 선언 당시 소니 등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할 때 삼성전자를 포함한 국내 기업은 반대로 사업을 확장해 러시아에서 선호 브랜드로 성공한 사례도 있다. 현대차도 2015년 GM등이 러시아 공장을 폐쇄할 때 버티기 전략으로 시장 점유율을 2위까지 끌어올렸다.
◇ 중국기업, 러시아 시장 점유율 확대
하지만 한국 등 서방국가 주요 기업이 러시아 시장에서 주춤하는 사이 중국 기업이 점유율을 높이고 있어 앞으로 국내 기업이 버틴다고 해도 앞으로 경영 환경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전쟁 전인 2021년 말,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1~2위는 삼성전자(35%)와 애플(18%)이었다. 그러나 작년 12월 각각 2%와 1%로 점유율이 급감했고, 같은 시기 샤오미 등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는 95%까지 확대했다.
자동차나 가전도 비슷하다. 작년 중국 제조사의 러시아 자동차 시장 합산 점유율은 17.9%로 전년(6.9%)보다 2배 넘게 늘었고, 현대·기아차는 22.6%에서 17.6%로 줄었다. LG전자도 작년 러시아법인 매출액은 약 9445억원, 순손실 약 232억원을 기록해 적자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