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2시(현지 시각) 워싱턴 DC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 미국의 크리스 르베르크 테라파워 CEO,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 등 두 나라의 기업·기관 대표 45명이 모여 북적댔다. 이날 한미 양국은 23건의 ‘양해각서(MOU) 체결식’을 진행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이 25일(현지 시간) 워싱턴DC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참석자는 “체결식이 너무 많아 한 MOU당 2분씩만 허용됐다”며 “서명하고 후다닥 기념사진을 찍고 바로 나와야 했을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방미 중인 가운데, 한미 양국은 25일(현지 시각) 첨단산업과 청정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을 공고히 하는 MOU를 23건 체결했다. 군사·안보 중심의 한미 동맹이 첨단 기술 동맹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전날 넷플릭스·온세미컨덕터를 포함한 미국 7개 기업이 한국에 총 44억달러(약 6조원)의 투자 계획을 밝힌 데 이어, 이날은 양국이 미래 산업과 에너지 안보에서 전방위적으로 협력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23건의 숨가쁜 MOU… 미국과 표준 같이 만든다

먼저 양국 기업들은 배터리·바이오·자율주행·항공·로봇 관련 기업·기관이 주요 기술·제품을 공동 연구·개발하고 인력 교류에 힘쓰기로 했다. 특히 자율주행·배터리·바이오 분야에선 국제 인증 기준과 표준도 함께 만들기로 했다. 표준을 공유한다는 건, 산업 전선에서 ‘같은 편’이 돼서 함께 싸운다는 의미다. 박정규 한양대 겸임교수는 “미국과 함께 표준을 정하면, 글로벌 시장 개척에 크게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 원전에 비해 안전성·실용성이 높아 미래 에너지원으로 각광 받는 소형모듈원자로(SMR)에서도 협력을 강화한다. SK이노베이션·한수원은 빌 게이츠(MS 창업자)가 세운 테라파워가 개발 중인 4세대 SMR의 상용화를 공동 추진하고, 두산에너빌리티는 미국 뉴스케일파워에 SMR 제작 기술을 지원한다. 청정 에너지로 각광 받는 수소·암모니아와 친환경 신사업으로 떠오른 탄소 포집·저장·활용(CCUS) 사업도 한전·SK·두산·GE·엑손모빌 같은 회사들이 전방위 협력하기로 했다. 이날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은 “이번 행사는 한미 양국이 안보 동맹을 넘어서 기술 동맹으로 나아가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기업 CEO들도 “한국 없으면 사업 못 해”

이날 오전 미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삼성·SK·현대차·LG·롯데 등 대기업 총수들과 퀄컴·IBM·마이크로소프트·보잉·GE·테슬라 등 미국 기업 대표 등 총 39명이 참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한미 양국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강력한 한미 동맹의 토대 위에서 긴밀히 협력해 왔다”며 “이제 미래 70년의 공동 번영을 위해 노력할 때”라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양국 기업인들은 기술 협력을 통해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겠다”고,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전기차·배터리 공장 투자를 통해 미국의 친환경 정책에 부응하고 있다”고, 구광모 LG 회장은 “LG는 GM, 테슬라 등과 배터리로 협력 중”이라고 말했다.

미국 기업인들은 한국 기업들과의 협력을 수차례 강조했다. 게리 콘 IBM 부회장은 “IBM은 삼성 반도체를 수입해 전 세계로 제품을 수출 중인데 한국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고, 히로시 록하이머 구글 수석부사장은 “삼성·LG와 협업을 통해 안드로이드를 개발했고 SK·삼성과 클라우드 컴퓨팅, AI에서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미 관계가 명실상부한 기술 동맹이 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1950년대부터 군사기술 협력을 시작, 최근 기술안보 동맹으로 진일보한 미·일 관계 수준에 도달하려면 반도체를 비롯해 항공우주·군사 등 최첨단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미 ‘반도체법’에 따른 불확실성도 해결 과제다. 미국의 대중 제재에 따른 압박으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사업은 위기에 처해 있다. 윤 대통령 방미 중에도 양국 간 물밑 협상은 이어지고 있어, 국내 기업에 대한 미 정부의 예외 조치 연장, 기술 업그레이드 허용 등에 대한 기대감은 아직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