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이 작년에 낸 적자는 33조원이다. 자본금 4조원, 연 매출 70조원인 회사가 1년 동안 기록한 적자 규모다. 임직원 2만3000명으로 나누면 1인당 14억3110만원 손실이다.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다. 불과 1년 전인 2021년 1인당 손실은 3억원. 중소 도시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지난해 정부에 보고한 14조3000억원의 자구안에서 한전은 절반가량을 자산 재평가로 확충한다고 밝혔다. 한전이 보유한 토지의 장부 가치는 6조2000억원에 이르는데, 이를 내년에 감정평가를 받아 7조원을 장부에서 늘려 13조2000억원대로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한 회계학 교수는 “내용물은 그대로인데 재평가를 통해 가격표만 두 배로 높여 위기를 모면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한전 경영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다. 그럼에도 정권의 정책을 앞장서 수행한 한전이 지금 와선 제대로 된 자구책도 내놓지 않고, 전 정권 탓을 하는 것을 두고 염치 없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한전의 공기업 경영 평가 성적은 부실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다시 한번 방증한다. 5일 본지가 공공 기관 경영 정보 시스템에서 국내 공기업 32곳 전수조사한 결과 2021년 평가에서 한전은 32공기업 중 중간 수준에 그쳤다. 노동생산성 18위, 자본생산성 14위 등이다. 자산이나 매출은 1, 2위를 다투는데 성적표는 한참 떨어진다.

인력도 급여도 깎지 않은 한전이 그나마 내세운 자구책이 더욱 심각한 것은 상당 부분 손실 부담을 민간과 자회사에 떠넘기는 방식이란 점이다. 한전은 지난해 말부터 전기를 사고 줘야 할 대금을 후려치는 이른바 전력 도매가격(SMP) 상한제를 도입했다. 에너지 전문가는 “국가 에너지 정책의 최후 보루 격인 한전이 정권의 코드에 순응하기만 했음을 감안하면 경영진과 조직이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한전 지분 1.27%를 보유한 영국 투자 회사 실체스터인터내셔널은 요금 인상을 촉구하는 항의 서한을 한전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조선해양은 2012년부터 적자가 쌓이며 4년간 5조원에 가까운 부실이 누적되자, 2016년 인력 20% 이상 감축과 임금 10% 이상 반납, 자회사 매각 등을 포함한 강도 높은 추가 자구 계획을 내놨다. 대우조선 노조는 철밥통의 상징 같은 민주노총의 핵심 산하 조직이었다. 2015년 말 1만3200명에 달했던 직원은 3년 뒤인 2018년 말에는 9900명대로 줄었고, 자구 계획이 마무리된 지난해 말에는 8600명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대규모 적자에도 작년 1년 동안 280명이 늘어난 한전과 차이가 크다.

◇한국 산업사에 최대 적자를 기록한 한전

2010년대 중반 벌어진 대우조선 등 조선 업계의 적자 사태는 한전의 천문학적 부실 이전까지 국내 산업계의 최대 규모였다. 2012년 721억원 적자를 낸 대우조선은 2013년부터 4년 연속 5000억원에서 2조1000억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적자를 냈지만 이 기간 누적 적자 규모는 지난해 한전과 비교해 6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인원이나 급여 감축 방안이 제대로 안 보이는 한전의 자구책에 대해 ‘일반 기업이었다면 이미 2021년에 문을 닫았을 것’이라는 비판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지난해 33조원에 이르는 지난해 한전의 적자 규모는 대한민국 산업사의 불명예스러운 신기록이자 세계적으로도 역대 10~20위권에 든다. 이런 적자는 세계적 금융 위기 때나 볼 수 있을 뿐, 일반적 기업 경영 활동에선 전례가 없을 정도다. 한전과 비슷한 수준의 적자를 낸 사례는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미국 시티그룹, 스위스 UBS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한전은 2021년에도 5조8000억원 적자로 역대 국내 상장사 최고 손실 기록을 세웠다.

◇대규모 적자에도 한전 1인당 기본급 1.7% 올라

이런 상황에 놓인 한전의 자구안을 들여다보면 14조원의 자구안 중에서 7조원을 자산 재평가로 만들고, 나머지는 자산 매각, 사업 일정 지연 등으로 마련하겠다고 한다. 인원 감축이나 임금 삭감 내용은 자구책에 없다. 민간 기업이라면 꿈도 못 꿀 적자를 내놓고서는, 스스로 희생은 없이 눈 가리기에만 급급한 자구안이다. 오히려 이 기간 한전의 인원은 증가했고, 급여는 다른 공공기관처럼 1.4% 올랐다. 자구안에 대해 비판이 커지자 지난달 “뼈를 깎는 심정으로 인건비를 줄이겠다”고 했지만, 알려진 건 성과급과 올해 연봉 인상분(1.7%)을 반납하겠다는 수준이었다. 위기에 둔감한 한전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강도 높은 자구안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한전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럴 거면 차라리 국유화하라”는 반발까지 나온다. 결국에는 국민 세금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다 보니 경영진도, 직원들도 위기를 제 일처럼 느끼지 못하고 남 탓만 한다는 지적이다.

한전은 대규모 적자를 낸 지난해에도 기본급이 1.7% 올랐고, 올해도 1.7% 오른다. 그나마 지난해 임원들과 처·실장급 간부들만 성과급 전부 또는 절반만을 반납했고, 일반 직원은 아예 성과급 반납조차 안 했다. 결과적으로 1인당 연봉은 2021년 8496만원이었는데, 지난해에는 불과 47만원 줄어든 8449만원이었다.

일반 기업이라면 대규모 적자로 회사 전체에 급여 삭감과 같은 칼바람이 불었겠지만, 한전에서 지난해 성과급을 반납한 사람은 임원과 1직급 간부를 포함해 2만3000여 명 중 1.5% 수준인 360명 수준이다.

자산 매각과 관련해서도 당시 대우조선은 서울 중구의 본사 사옥을 비롯해 알짜 부동산을 매각했지만, 한전은 양재동 한전아트센터, 여의도 남서울본부 등 핵심 자산은 여전히 매각 대상에서 제외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민간 기업에 이 정도 부실이 생겼다면 제일 비싼 부동산부터 내놨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