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한국 기업과 손잡은 중국 배터리 소재 기업의 조(兆) 단위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4개월 만에 SK온, LG화학 등 주요 기업 중심으로 한중 합작법인 투자만 약 5조원 규모가 발표됐다. 중국 현지에 한국 배터리 기업이 들어가 합작법인을 세우고 대규모 투자를 했던 이전과 정반대 양상이다.
◇조 단위 한중 합작 투자 이어진 배터리 소재
포스코퓨처엠(옛 포스코케미칼)은 세계 최대 코발트 채굴 업체인 중국 화유코발트와 합작사를 설립해 1조2000억원을 투자해 경북 포항 블루밸리산단에 전구체 생산 라인을 구축한다고 지난 3일 발표했다. 전구체(니켈·코발트·망간 화합물)는 배터리 단가 40~50%를 차지하는 양극재의 핵심 재료로, 약 90%를 중국에서 수입하며 의존도가 높은데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LG화학도 화유코발트와 손잡고 전북 군산 새만금국가산업단지에 1조2000억원을 투자해 전구체 공장을 짓는다. 앞서 지난 3월 SK온과 에코프로머티리얼즈도 중국 거린메이(GEM)와 손잡고 새만금산단에 1조2100억원 규모 전구체 공장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 국내 합작사를 찾는 것으로 알려진 세계 최대 전구체 기업 중국 CNGR의 1조원 투자, 한국 자회사 재세능원을 통해 1조원 규모 양극재 공장 증설 계획을 밝힌 중국 룽바이를 포함하면, 발표된 투자 규모만 5조원을 넘는다.
◇美 압박에 韓 우회 피난처 삼은 中
업계에선 미국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직격탄을 맞은 중국 배터리 소재 업체들이 한국을 우회 피난처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IRA 세부지침에 따르면 배터리 광물을 가공할 때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40% 이상(올해 기준)을 조달해야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 입장에선 새만금산단 등의 법인세 감면 혜택도 기대할 수 있다.
전구체 등 주요 소재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았던 우리 기업도 공급망 강화 측면에서 이해관계가 맞았다. 리튬·코발트·망간 등 이차전지 핵심 광물의 글로벌 공급망 대부분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중국 소재 기업을 포기하기 어렵다. 한 업체 관계자는 “중국이나 해외 합작 법인보다 국내 합작은 안정성이 낫다”며 “향후 문제가 생기더라도 합작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국내업체가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해외 우려 단체’ 리스크 여전... 합작 법인까지 규제하나
투자 계획은 장밋빛이지만 변수는 남아있다. 미국 IRA는 해외 우려 단체(FEOC)의 핵심 광물이나 배터리 부품이 포함된 전기차를 2025년부터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는데, 작년 말 IRA 백서는 이미 중국 등을 FEOC로 지정했다. 향후 공개될 구체적인 적용 범위에서 FEOC에 중국 기업과의 합작법인이 문제 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IRA와 비슷하게 미국의 대중 견제가 이어지고 있는 ‘반도체법’의 경우, 합작법인에서 중국 측이 25% 의결권만 지녀도 설립 지역, 과반 의결권 보유 주체와 무관하게 FEOC로 분류하고 있고, IRA 세부 지침도 이를 참고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배터리 시장이 탄탄한 국내시장을 겨냥한 중국 업체의 진출은 더 넓어지고 있다. SK온 등에 배터리 장비를 공급해온 중국 항커테크놀로지는 올해 1월 국내 전지 제조 회사 ‘비츠로’와 합작법인 ‘HK파워’를 설립하고 3000만달러(약 400억원) 투자를 발표했다. 또 다른 중국 장비 업체 리릭로봇도 최근 국내 지사를 설립하고 한국 기업과 협력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향후 장비 분야까지 규제가 확대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한국 시장 진출이 활발해지는 분위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