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가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대한항공은 세계 14국에 기업결합 허가를 신청해 11국에서 승인을 받았지만 양대 항공시장인 EU(유럽연합)와 미국이 독점(獨占)을 심화시킬 것이라며 사실상 합병 반대 입장을 내놓은 탓이다. 3년째 진행 중인 양대 국적 항공사의 합병이 무산될 경우 우리나라 항공산업에 적지 않은 타격이 불가피해 두 항공사는 물론 정부도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23일 항공업계 등에 따르면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은 지난 12일(현지 시각)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 원유석 아시아나항공 대표 등과 함께 미국 법무부(DOJ) 차관을 면담했다. 기업결합을 심사 중인 미 법무부 차관이 해당 기업 당사자들을 불러 의견을 들은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면담에서 미 법무부는 이번 합병이 대한항공의 시장 독점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전달하며 독점을 해소할 대체 항공사를 찾아오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다만 미 법무부로부터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니 계속 논의하자”는 답변을 받고 돌아왔지만, 미국이 요구하는 독점 우려를 해소하지 못하면 소송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합병 무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그래픽=백형선

◇EU 이어 미국도 “독점 우려”

미 정부는 대한항공·아시아나가 운항하는 한-미 노선 13개 가운데 5개(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뉴욕·LA·시애틀) 노선에서 독점이 커진다고 주장한다. 인천-샌프란시스코는 유나이티드항공, 인천-호놀룰루는 하와이안항공이 운항하지만, 점유율이 20% 수준이다. 나머지 노선은 대한항공·아시아나·델타항공이 운항하는데 델타항공은 대한항공과 ‘조인트벤처’라는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고 노선을 공유 중이어서 미국 정부는 사실상 같은 회사로 보고 있다.

대한항공은 미국 측에 한-미 노선 이용객이 대부분 한국인이어서 미국 소비자에게 영향이 없다는 점, 다른 경쟁 항공사가 운항하지 않는 것은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점, 국내 LCC(저비용 항공사)인 에어프레미아가 최근 미주 노선을 확대 중이어서 독점도가 낮아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에어프레미아는 지난해 11월 국적 항공사로는 세 번째로 미국 노선에 취항해 주 5회 인천과 LA를 운항 중이다. 앞으로 뉴욕·샌프란시스코로 노선을 늘린다는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공식 의견을 주거나 일정을 정해주지 않아 언제 어떤 결론이 나올지 모른다”며 “경쟁 제한 우려가 있을 경우 소송을 통해 법원 판단을 받는 구조”라고 말했다.

앞서 EU도 지난 17일(현지 시각) 중간심사 보고서에서 “두 항공사의 병합이 한국과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4개 노선에서 여객 운송 서비스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대한항공은 이런 EU의 우려를 없애기 위해서는 항공 노선 슬롯(특정 시간대 이착륙할 수 있는 권리) 일부를 외국 항공사에 넘기는 시정조치를 해야 EU 승인을 얻을 수 있다. EU 최종 승인은 8월 3일 나올 예정이다.

◇물러설 곳 없는 대한항공·아시아나

지난 2019년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금호그룹은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하기로 하고, HDC현대산업개발과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계약은 취소됐다. 2020년 11월 채권단 대표인 산업은행은 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대한항공은 1조원의 계약금·중도금을 아시아나에 냈고, 잔금 8000억원을 남겨놨다. 앞서 산은과 수출입은행 등은 지난 2019~2020년 아시아나에 3조6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 법무부가 독점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면 합병은 크게 지연될 수 있다.

미 법무부가 소송을 제기해 합병이 지연되면 아시아나 파산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시아나의 부채비율(자본 대비 부채)은 지난 1분기 기준 2013%로 총부채 규모는 12조8000억원에 달한다. 다만 코로나 엔데믹으로 아시아나의 영업이익(지난해 7416억원)이 회복되고 있어 재매각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있다. 대한항공 측은 “미국의 최종 입장은 정해지지 않았다”며 “경쟁 제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설득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두 항공사 합병이 무산되면 두 항공사는 물론 우리나라 항공 산업 전체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국가 경제에도 큰 타격이 될 것”이라며 “현재 상황은 민간 기업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만큼 최근 우호적인 한미 관계 등을 고려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