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의 배터리 제조업체들이 EU(유럽연합)에서 본격적인 시장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5월 15일 벨기에 브뤼셀의 EU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모습./AP연합뉴스

한국과 중국의 기업들이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배터리 시장인 EU(유럽연합 27개국)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한국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기업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맹추격해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점유율 1위인 한국과 2위인 중국이 정면 대결하는 양상이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규제로 미국 수출길이 막히자, 대안으로 EU 시장 개척에 필사적이다. EU도 미국과 달리 늘어나는 배터리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중국 기업의 투자유치에 적극적이어서 한국 기업들의 수성 작업이 갈수록 어려워질 전망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터리제조업체인 LG에너지솔루션. 유럽에서 중국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수성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파크원의 LG에너지솔루션 본사 로비./뉴스1
세계 최대 배터리 생산업체인 중국의 CATL. 수주도 받기 전에 유럽에 먼저 공장을 짓는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4월 18일 중국 상하이 모터쇼 내 CATL 전시장./로이터 연합뉴스

폭증하는 유럽 시장

EU는 세계 2위의 전기차 판매국이자 배터리 수요 대국이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를 탄소중립 시대의 전략 산업으로 적극 육성하고 있어서 배터리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컨설팅회사 매킨지에 따르면 전세계 리튬이온 배터리 수요는 2022년 700GWh(기가와트시)에서 매년 33%씩 증가해 2030년에는 4.7TWh(테라와트시)로 증가할 전망이다. 이 가운데 EU는 2030년 전세계 수요의 23%를 차지해 중국(43%)에 이어 2위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 완성차업체들은 전기차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전기차용 배터리 자급률은 매우 낮다. 사진은 지난 2021년 6월 8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한 운전자가 폭스바겐의 전기차 ID.3를 충전하고 있는 모습./로이터 연합뉴스

이러한 폭발적인 수요에 맞추기 위해 독일·폴란드·헝가리·스페인 등은 2030년까지 배터리 셀 제조공장 62곳, 소재 부품 공장 22 곳을 건설할 예정이다. 이들 국가들은 해외 배터리 기업 유치를 위해 대규모 보조금 및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어서 투자 여건도 좋은 편이다.

시장 선점한 한국

한국 기업은 일찍 유럽에 진출해 에너지 밀도와 주행거리 면에서 우수한 삼원계 양극재 분야에서 시장을 장악했다. 2017년 LG에너지솔루션이 폴란드 브로쵸와프에서 5GWh 공장을 가동한 것을 시작으로, SK온(헝가리), 삼성SDI(헝가리)가 EU 현지에서 공장을 확장중이다. 또 SKIET, 솔루스첨단소재, 포스코홀딩스, 성일하이텍, 에코프로비엠 등 10여개 소재 부품기업들이 공장을 가동 중이거나 신설할 계획이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독일, 헝가리, 폴란드 등에 현지 공장을 갖고 있다. 사진은 한국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온의 헝가리 코마롬 공장./SK이노베이션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2022년 기준 한국의 EU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63.5%. 한국 기업들이 유럽 현지에 공장을 세운 덕에 한국에서 유럽에 수출되는 배터리 소재인 양극재의 수출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지난 2022년 EU에 수출한 주요 수출품목 중 양극재와 배터리가 각각 1위와 4위를 차지했다.

중국의 맹공

중국은 미국의 규제로 미국 시장 진입이 어려워지자 막대한 자금력과 정부 지원을 배경으로 EU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중국 완샹그룹이 2017년에 체코의 오스트라바에서 공장 가동에 들어간 것을 비롯해, 저장난양, 궈타이화롱 등이 독일과 폴란드에서 가동중이다.

또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업체인 CATL은 현재 독일에 14GWh 공장을 세워 독일 자동차 회사인 메르세데스-벤츠와 BMW에 납품하고 있으며, 오는 2028년까지 독일과 헝가리의 생산능력을 200GWh 규모로 확대할 예정이다. 고션하이테크, SVOLT, 엔비전AESC도 독일, 프랑스, 스페인에 2030년까지 모두 146GWh 규모의 5개 공장을 짓는다.

중국 배터리업체 CATL의 독일 아른슈타트공장./폴-필립 브라운, 로이터 연합뉴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한국의 삼원계 배터리와 달리 중국의 주력품인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는 품질은 떨어지지만 가격이 20~30% 정도 저렴하다. 또 중국의 배터리 제조 장비 평균 가격도 한국의 약 80% 수준이다. 중국업체들은 이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유럽 전기자동차 뿐 아니라 전기자전거 같은 소형 저가 이동기구 시장도 공략하고 있다.

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김희영 연구위원은 “배터리 공장은 먼저 수주를 받은 뒤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시설”이라며 “CATL 헝가리 공장의 경우 완성차 업체의 수주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공장부터 짓는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좁혀지는 한·중 격차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한국의 EU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2020년 68.2%에서 2022년 63.5%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중국의 점유율은 16.8%에서 34.0%로 2년만에 배로 늘어났다.

중국의 EU 시장 점유율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한국 기업은 미국과 EU에 동시에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반면, 중국 기업은 미국 진출이 어려워지면서 EU에 집중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중국 배터리 업체의 유럽 공장시설 투자액은 33억 유로(약 4조7000억원)로, 중국 전체 해외투자의 3분의 1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EU 진출에 사활을 걸고 있는 만큼 향후 한국 기업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세계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에 맞서, 매년 33%씩 성장하는 한국 배터리 산업(골드만삭스 추정)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EU 시장 점유율 확보가 절실하다고 보고 있다.

최선집 월드클래스기업협회 고문은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에 각종 세금과 장려금을 지원하면서 해외 진출을 독려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도 이에 상응하는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향후 1~2년이 세계 배터리 판도 좌우...대규모 자금 지원해야”

장상식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실장 인터뷰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동향분석실장

장상식 국제무역통상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전기차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1~2년 내에 완성차 기업의 배터리 제휴 기업 선정이 본격화될 예정”이라며 “그 결과에 따라 5~6년 후 세계 배터리 산업의 판도가 좌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또 “배터리 제조업은 완성차 업체의 수주를 받은 뒤 그 수요에 맞추기 위해 현지에 공장을 세워 대규모 설비투자를 해야 하는 산업”이라며 “유럽 완성차 업체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지시장 진출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장 실장은 “납품을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우리기업들은 투자자금 부족으로 인해 유럽의 배터리 수요 증가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연간 20GWh(기가와트시) 규모의 생산설비 구축시 약 2조~2조5000억원의 설비투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이 EU 시장에 적극 진출할 수 있도록 정부가 수출입은행 신용제공 한도와 투자세액 공제를 확대하고, 배터리 제조에 사용되는 핵심광물의 안정적 확보와 비축에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중 배터리 전쟁에서 이기려면 중국 정부의 자국 기업 지원에 상응해 한국 정부도 적극적인 자금과 세제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지난 3월 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배터리 산업 전시회 '인터배터리 2023'을 찾은 관람객들이 전기차 배터리를 살펴보고 있다./뉴스1

장 실장은 또 한국 기업이 EU에 진출할 경우 회원국별로 투자 여건과 우대 정책이 달라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며 독일·헝가리·폴란드·스웨덴 등 4개국을 추천했다.

독일은 폭스바겐, 메르체데스-벤츠, BMW 등 완성차 업체 접근이 용이하며, 특히 EU 내에서 완성차 시장 점유율이 55%에 달한다. 헝가리는 법인세율이 9%로 EU 내에서 가장 낮다. EU의 평균 법인세율은 21.5%이다.

유럽 진출을 모색하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전기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스웨덴을 후보지로 고려해 볼만 하다고 전문가들은 추천한다. 사진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시내./요나탄 스벤슨 글라트(위키피디아, 2016년 9월 21일)

폴란드는 25세 미만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25%를 차지해 젊고 숙련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스웨덴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에너지 중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이 97%에 달해 EU 내에서 전기료가 가장 낮고, 환경 규제 측면에서도 유리하다고 장 실장은 추천했다.

장 실장은 “EU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EU 역내 기업과 동반 참여하거나 합작 기업을 설립하는 등의 진출 방식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