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GM의 주력 전기차 모델 볼트에는 LG에너지솔루션(엔솔)의 배터리가, 미국에서 없어서 못 판다는 포드의 전기차 F150 라이트닝에는 SK온 배터리가 들어간다. 독일의 폴크스바겐과 BMW의 최고 인기 전기차인 ID4, i4의 배터리도 각각 LG엔솔과 삼성SDI가 만든 것이다. 이처럼 한국 배터리는 자동차 3대 시장 중 2곳인 미국·유럽 전기차 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중국을 뺀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은 올 1분기 49%에 달한다. 1992년부터 30여 년간 끈기 있는 투자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인정 받은 덕분이다.
하지만 ‘한국 배터리’가 맨 처음 도전장을 내밀었던 곳은 중국 시장이었다. 좀처럼 열리지 않던 배터리 최대 수요처인 전기차 시장이 중국에서 물꼬가 트기 시작한 것이다. 2014년 무렵이었다. 당장 LG와 삼성은 중국 현지 공장을 착공했지만, 완공되기도 전인 2015년 5월 중국은 ‘제조 2025′를 발표하며 자국 배터리 산업 보호에 대놓고 나섰다. 이듬해부터 7년간 중국서 만들더라도 한국 기업 배터리에 대해선 보조금을 배제하면서 우리 기업 점유율은 2%까지 폭락했다. 국내 다른 산업이 2017년 ‘사드 보복’으로 밀려나기 1년 전부터 중국 시장에서 타격을 입은 한국 배터리는 역설적으로 더 빠른 속도로 유럽과 미국으로 눈을 돌린 덕분에 글로벌 전기차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우뚝 섰다. 이호근 대덕대 교수는 “배터리는 중국의 견제와 차별이 오히려 보약이 된 대표 사례”라고 말했다.
2016년 1월 중국 정부는 삼원계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버스에 보조금 지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업체들이 주력으로 하던 삼원계를 꼭 집어 배제한 것이다. 심지어 그해 연말인 12월 29일엔 오전 발표까지만 해도 보조금 지급 대상에 포함돼 있던 LG엔솔·삼성SDI 배터리가 탑재된 차량 5종이 오후에 수정 발표되면서 빠지기도 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당시 중국 누구도 갑자기 뺀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차별 받던 그 7년 동안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발 빠르게 유럽과 미국이라는 선진 시장 개척에 올인해 주도권을 꿰차고 있다.
◇유럽·미국으로 눈 돌려… 저돌적 영업으로 수주 잭팟
2016년 중국의 보조금 지급이 끊기기 시작하자 한국 배터리를 쓰기로 했던 완성차 업체들은 발주를 취소했다. LG와 삼성은 당시 수천억원을 들인 중국 공장을 심지어 2년여 동안 가동률 50% 이하로 놀리기도 했다. 적자가 누적되던 이 회사들은 죽기 살기로 세계 2위 전기차 시장인 유럽 공략에 나섰다. 배터리 업계 고위 관계자는 “마케팅 임원이 유럽 업체 회사 부근에 호텔 방을 얻어 놓고 구매 담당자가 부르면 가고, 부르면 가고 하면서 배터리를 사달라고 영업했다”며 “지금은 한국 배터리 우수성이 입증되면서 갑을 관계가 바뀌어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부탁을 한다”고 말했다.
LG엔솔 관계자는 “2~3년 후에 출시하는 전기차를 위한 고스펙 배터리를 제안하고 그 사이 개발과 생산을 완료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었다”며 “하지만 수주를 해서 레코드를 쌓지 않으면 추가 수주가 불가능하기에 도전만이 유일한 답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도전의 결과 유럽에서 조단위 수주가 이어지며, 우리 배터리 3사는 현재 유럽 내 공장 규모를 137.5GWh까지 키워, 작년 EU 시장 점유율 63%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에선 더 큰 잭팟이 터졌다. 테슬라 독주를 막겠다며 전기차 전환에 뛰어든 미국 자동차 ‘빅3′(GM·포드·스텔란티스)가 한국 배터리 3사에 동시다발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이 러브콜에 적극 부응하면서 한국 배터리 3사는 미국 ‘빅3′가 북미에 설립 또는 2026년까지 계획 중인 배터리 공장 총 11개 중 9개(총 382GWh)를 독식했다. 2025년엔 ‘빅3′를 포함해 미국에서 쓰이는 전기차 배터리의 70%를 한국 제품이 장악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미쳤다’ 할 정도로 과감한 투자
고성능 전기차 30만대를 만들 수 있는 30GWh 배터리 공장을 짓기 위해선 4조~5조원이 필요하다. 50대50 합작을 하더라도, 배터리 업체가 공장 하나에만 2조원 이상 투입해야 한다. 3사가 2019~2026년 북미에 투자하는 금액은 총 44조원이다. 이 같은 수십조 단위 투자는 배터리 업계에서조차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는데, 전기차 보급이 예상보다 더뎌지거나 화재 같은 리콜로 거액을 배상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광주 SNE리서치 대표는 “일본 업체들이 ‘전기차가 시기상조’라며 돌다리를 두드려보는 사이 과감히 투자에 나선 한국 배터리 업계가 승기를 잡았다”고 말했다. LG에서 배터리 연구원을 한 이상영 연세대 교수는 “한국 배터리는 과감한 투자와 베팅의 연속이었고, 그 결실을 보는 것”이라며 “콧대 높던 일본 자동차 혼다와 도요타가 LG와 배터리 합작을 위해 손을 내미는 건 과거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