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감사원의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감사 결과에서 전 국민을 가장 충격에 빠뜨린 것은 공무원이 권한을 남용하고 민간 사업자와 결탁해 비리를 저지르고, 업자들은 눈먼 보조금을 챙기기 위해 달려든 ‘태양광 복마전’이었다. 이런 비리의 원인은 문재인 정부의 ‘태양광 과속(過速)’이 지목된다.
더 큰 문제는 지난 정부의 태양광 과속이 현 정부에서도 법령 개정 없이는 속도 조절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현행법과 이에 근거한 각종 에너지 계획에 따르면 현 정부에서 연평균 태양광 보급 규모는 문재인 정부의 1.5배에 달하게 된다. 국회를 장악하며 밀어붙여 만든 지난 정부의 ‘신재생 대못 법’이 워낙 넓고, 깊숙하게 박힌 탓에 태양광 과속이 폭주 수준으로 속도를 더 높여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처벌을 염려해 법과 규정이 바뀌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공무원 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현재 법령 아래에서는 제대로 된 에너지 정책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지난 정부가 임기 말 공포한 ‘탄소중립기본법’은 국가 전반의 에너지 계획을 망가뜨리는 주범으로 꼽힌다. 지난 정부는 2021년 국제사회에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줄이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탄소기본법과 시행령에 못 박았다. 이런 탓에 국가의 주요 에너지 계획은 물론 지자체 계획까지 이에 맞춰야 했다. 발전소 건설, 천연가스 계약은 물론, 철강 생산, 아파트 건설에 이르기까지 국가 경제·산업 전반을 무리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구속해 둔 것이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일부 EU(유럽연합) 국가를 제외하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법으로 정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며 “법에 목표를 못 박은 탓에 다른 법률과 계획이 영향을 받으며 국가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를 반년 앞둔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COP 26(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우리나라의 ‘2030 NDC(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26.3%에서 대폭 높인 40%로 선언했다. 당시 UN(국제연합) 143국의 목표치를 모두 합쳐도 2010년과 비교해 9% 감축에 그치는 상황에서 제조업 비중이 큰 우리나라가 이런 목표치를 내놓은 것을 두고 전문가와 산업계에서는 ‘자해(自害)’ 수준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문 정부는 이를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문 정부는 앞서 같은 해 9월 탄소중립기본법에 감축 목표를 ‘35% 이상’으로, 임기 만료 두 달 전엔 시행령에 ‘40%’로 못 박았다.
◇전력 계획부터 신축 건축물까지 모두 영향
문 정부가 대선을 전후해 내놓은 탄소중립법과 시행령은 현 정부의 에너지 계획 수립 과정에 유령처럼 아른거리며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올 초 내놓은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대표적이다. 현 정부는 탈원전 정책 폐기를 반영해 2021년 27.4%였던 원전 비율을 2030년 32.4%까지 높이기로 했다. 하지만 신재생 또한 7.5%에서 21.6%까지 늘리기로 했다. 2030년까지 발전 부문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2018년보다 45.9%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원전 가동을 늘리는 것으로는 부족했고, 나머지를 태양광·풍력 확대로 맞출 수밖에 없었다. 건설을 재개하기로 한 신한울 3·4호기는 2032~2033년에야 가동이 가능해 2030년 계획에는 보탬이 되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10차 계획에선 태양광을 비롯한 신재생 에너지의 연평균 보급량이 5.3GW(기가와트)로 지난 정부(연평균 3.5GW)보다 50% 이상 늘었다. 지난 정부의 태양광 과속에 따른 각종 비리를 규명하겠다는 현 정부가 지난 정부가 만든 법 규정에 구속되다 보니 태양광 보급 속도를 더 높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원전과 신재생 발전이 급증하면서 LNG(액화천연가스) 발전도 유탄을 맞았다. 10차 계획에선 LNG 발전이 줄면서 2030년까지 LNG 수요가 연평균 5% 이상 감소하게 된다. 이에 맞춰 LNG 수입도 줄여야 하지만 정부는 계획보다 더 수입할 수 있도록 ‘수급관리수요’라는 항목을 신설해야 했다. 계획 수립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법률 규정을 어겨가며 LNG 수입 계획을 짤 수도 없고, LNG를 확보해놓지 않을 경우 자칫 심각한 에너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한 고육지책이다”고 말했다.
산업계도 걱정이 태산이다. 3월 발표한 ‘2030 NDC 이행계획’에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14.5%에서 11.4%로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산업계가 감축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5%를 크게 웃돈다. 석유화학은 2018년과 비교해 2026년이면 설비 규모가 50% 이상 늘어나는데도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는 “수정된 2030 NDC 계획도 기업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건설업계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난 정부가 공공주택은 올해부터, 민간주택은 내년부터 제로에너지 건축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제로에너지 건축이란 건축물의 단열 성능을 강화하고, 태양광·지열 등 신재생에너지를 자체 생산하는 건축 방식이다. 건설업계는 제로에너지 요건을 맞추려면 공사비가 5~10% 정도 늘어날 것으로 추정한다. 수도권의 한 중견건설사 대표는 “최근 철근, 시멘트 등 자재값이 급등한 상황에서 제로에너지 의무화까지 더해지면 공사비가 30~40%는 폭등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탄소중립법 개정해야”
이런 가운데 시급한 법인 사용후핵연료 처분을 위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특별법’이나 에너지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에너지법’ 제·개정은 전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 정책 발목을 잡는 법들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상황이지만 정작 필요한 법에는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에너지 기본계획은 세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탄소중립기본법이 산업·발전 분야를 옥죄고 있다”고 말했다. 법과 시행령에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삭제해 보다 현실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성봉 숭실대 교수는 “법령에서 숫자를 빼거나 문구를 조정해 유연성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에너지 업계 한 인사는 “환경부가 아닌 국무조정실로 담당 부처를 옮기고 범부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