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양인성

중국발 공급과잉과 수요 부진으로 실적이 악화하던 국내 정유·석유화학 업계가 러시아의 ‘원유 덤핑’까지 겹치면서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지난해 반도체에 이어 수출 2위와 3위 품목이었던 정유, 화학제품의 수출이 급감하면서 수출액마저 1년 전보다 20% 안팎으로 줄어들어 국가 경제에도 적잖은 타격을 주고 있다.

제2의 산유국인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 제재로 수출길이 막히자 헐값에 원유를 수출하고 있다. 이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곳이 중국과 인도로, 우리의 석유화학 최대 경쟁국이다. 이들은 값싼 원료를 사들여 저렴한 제품을 만든 뒤 우리 주요 수출국인 동남아와 유럽까지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이들에 비해 비싼 원유를 사야 하는 국내 업체들은 손해를 보며 제품을 팔게 돼 적자를 보는 것이다. 화학업체들뿐 아니라 원유를 정제해서 수출하는 정유 업계도 경쟁국인 중국·인도에 비해 비싼 원유를 사오면서 실적이 악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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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원유 덤핑에 중국·인도·사우디 웃어

5일 정유 업계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러시아 원유 가격은 국제 유가 기준이 되는 두바이유나 WTI 가격과 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전쟁 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 원유 수입에 제재를 가하면서, 러시아는 우호국들에 시장 가격보다 훨씬 싼값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올해 두바이유는 배럴당 80달러 안팎을 오갔는데, 러시아 우랄산 원유는 이보다 30~40% 저렴한 40~50달러였다. 이에 중국과 인도가 작년 하반기부터 러시아유 수입을 본격적으로 늘리며, 현재 러시아 원유 수입국 1~2위를 다투고 있다. 정유 업계 관계자는 “중국·인도는 대량 구매하기 때문에 40% 이상 싼 가격에 사고 있다”며 “수출이 70%인 국내 정유사들은 사우디에서 비싼 값에 사온 원유로 정제해 팔면서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고 말했다.

정유업계는 작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역대급 실적’ 호황을 누렸다. 2월 전쟁 발발로 유가가 급등하며 정제 마진이 커진 것이다. 하지만 하반기부턴 수요 부진에 따른 유가 하락과 러시아 원유 덤핑 영향이 본격화되며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실제 싱가포르 평균 정제마진은 지난 2분기 배럴당 4.1달러로, 작년 2분기 21.5 달러에서 급락했다. 업계 관계자는 “싱가포르 정제마진은 두바이유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으로, 러시아유를 사용할 경우 훨씬 큰 이익이 날 것”이라며 “정유 업계 손익분기점은 4달러 수준인데, 지금 국내는 3~4달러 수준”이라고 말했다. 증권가는 올 2분기 국내 정유사 3사 영업이익이 8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다.

러시아 원유 가격이 싸지자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조차 올해 러시아 원유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업계 관계자는 “사우디는 러시아유를 사서 자체 수요를 충족하는 한편, 사우디 원유에 일부를 섞어 팔기도 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발 부진에 러시아유 덤핑까지 덮친 화학업체들

원유 정제 후 남는 부산물로 플라스틱 같은 제품을 만드는 화학업체들도 러시아 원유 덤핑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그동안 중국 수출에 60~70% 의존해온 우리 화학업체들은 중국의 화학설비 공급과잉과 범용 제품 자급자족으로 실적 부진이 지속해왔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 원유 덤핑으로, 화학제품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폭락하면서, 우리 최대 시장이었던 중국은 최대 경쟁국이 되고 있다. 실제 석유화학 업황을 가늠하는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나프타 가격 차이)는 15개월째 손익분기점(300달러)을 밑돌고 있다. 화학 업계 관계자는 “여수·울산에 밀집한 국내 대규모 나프타 공장들은 현재 돌릴수록 손해가 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LG화학은 ‘여수 NCC(나프타분해설비) 2공장’ 가동을 4월부터 중단한 상태다. 매각설도 흘러나오고 있지만, “아무도 사려는 곳이 없을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특히 중국과 경쟁이 치열한 범용 제품 비중이 높은 롯데케미칼 경영 상황은 심각하다. 지난해 7000억원 넘는 적자를 냈고, 올해 1분기도 262억원 적자를 냈다. 올 상반기 석유화학제품 수출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2% 감소한 232억달러에 그쳤다. 석유 제품(정제유 등) 수출은 19.5% 감소한 246억달러였다. 지난해 수출 기여도 2·3위였던 이들 품목은 올 상반기 자동차·일반기계 품목에 밀렸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석화 업황은 불경기가 지나면 호황기가 오는 사이클이 있었지만, 이제 범용 제품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비관론이 팽배해 있다”며 “각 사가 생존을 위해 배터리 소재, 바이오 같은 신사업을 찾아나서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