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가 정신 포럼’에 쏠린 관심 - 10일 진주시 내동면 능력개발관 대강당에서 열린 ‘K기업가 정신 국제 포럼’에 참가한 외국인들이 개회식을 지켜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행사 사진을 찍고 있다. 이날 포럼에선 서양의 기업가 정신과 K기업가 정신을 비교하는 세션도 진행됐다. 해외 학자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부각되는 현재, 공동체를 우선한 K기업가 정신에 해답이 있다”고 했다. /진주시

10일 인구 34만명의 중소도시 경남 진주에 있는 한 대강당은 세계 47국에서 온 외국인 150여 명으로 북적였다. 이날 오전 진주시 내동면 능력개발관 대강당에서 열린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에 참가하기 위한 학자·기업인·학생들이다. 이 행사는 진주시와 세계중소기업협의회(ICSB)가 “삼성·LG·GS·효성 창업주의 ‘사업보국(事業報國)’ 철학이 진주에서 발원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공동 기획한 행사다. ICSB는 1955년 미국에서 설립돼 90국 50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비영리 단체다. 주로 학자, 기업인으로 구성됐는데 ‘유엔 세계 중소기업의 날’을 제정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 곳이다. ICSB 회장인 아이만 타라비시 조지워싱턴대 경영학과 교수는 작년 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가 “진주에 가면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의 이병철 창업주를 비롯해 LG 구인회, GS 허만정, 효성 조홍제 창업주가 동시대에 교류한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진주를 찾았고, 진주시와 이 포럼을 함께 준비했다. 타라비시 교수는 “대기업 4사가 어떻게 한 거리(same street)에서 시작할 수 있었는지, 할리우드 영화 시나리오 같은 이야기”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더 커진 현재, 한국과 진주의 ‘K기업가정신’이 ‘한강의 기적’, ‘K팝’처럼 더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는 “1960년대 가장 가난했던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며 “이는 예부터 이웃과 나라, 그리고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우리만의 독특한 기업가정신이 발현된 것으로, 해외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말했다.

10일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에서 주목받은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은 ‘한국 산업화의 성지’라는 찬사를 받는 곳이다. 한국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 삼성·LG·GS·효성의 1세대 기업인들이 동시대에 한곳에서 교류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래픽=백형선

이들이 일군 기업들은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으로 성장했다. 삼성 일가는 삼성·CJ·신세계·한솔, LG 일가는 LG·LS·LX·LIG·LF·아워홈, GS그룹 일가는 GS·삼양통상·삼양인터내셔날·승산·새로닉스·코스모, 효성 일가는 효성·한국앤컴퍼니(한국타이어)를 운영 중이다. 이 중 삼성·신세계·CJ·LG·LX·LS·GS·효성·한국타이어·한솔 등 10개 그룹의 매출(2022년 말·대기업 집단 지정 기준, CXO연구소)은 800조원(약 6100억달러)으로, 전 세계 GDP 순위 23위인 스웨덴(6274억달러)과 맞먹는다.

포럼 개최를 주도한 아이만 타라비시 세계중소기업협의회(ICSB) 회장은 “호수와 산을 낀 진주의 지리적 위치, 유서 깊은 유교 전통뿐 아니라 실천주의 유학을 실현한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까지 더해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경제 생태계를 이뤘다”며 “진주는 5년 후, 10년 후에는 한국 기업가정신의 모태 도시로 더 주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보국, 인화단결… ‘나라와 사람이 우선’

포럼에선 한국 1세대 창업주들이 개인보다 이웃과 나라를 더 걱정했다는 공통점에 많은 학자와 기업인들이 주목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생전에 “모든 것은 나라가 기본이다. 나라가 잘되어야 기업도 잘되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사업보국’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고, 여기에 더해 ‘인재 제일, 합리 추구’를 경영 철학으로 삼았다. 구인회 회장 역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며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에 보탬이 되어야 기업이 영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인화단결’은 LG의 전통이 됐다.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허만정 선생은 평소 “돈은 개미같이 부지런히 모으되, 의로운 일에는 크게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해진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 독립운동 조직 백산상회에 자금을 댔다. 구씨와 허씨가 시작한 동업은 2005년 허씨 일가가 GS그룹을 분리해 나올 때까지 50년간 지속됐다.

효성의 창업주 조홍제 회장은 평소 “도리에 어긋나는 길을 가는 기업은 반드시 망한다”고 확신했고, 국리민복(國利民福)과 숭덕광업(崇德廣業·덕을 높이고 업을 넓힌다)을 경영 철학으로 삼았다.

9일 승산마을 투어에 이어, 10일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에 참가한 이탈리아 대학생 가에타노 데 로사씨는 “삼성, LG 같은 한국의 글로벌 기업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기업가정신에 대해서는 사실 생소했는데, 이번에 좋은 기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필리핀에서 식품 업체를 운영하는 비엘 호세씨는 “단순히 이윤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와 국가를 우선에 뒀던 한국 기업가정신에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진주시, ‘한국 기업가정신’ 관광 벨트 조성

진주시는 산업화 초기부터 ‘공동체’와 ‘사람’에 주목했던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세계 곳곳에 확산시키기 위해 K기업가정신 관광 벨트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병철·구인회가 다닌 초교의 ‘부자 나무’ 앞에서 -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 참가자들이 지난 9일 옛 지수초등학교(현 K기업가정신센터) 소나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삼성 이병철 창업주와 LG 구인회 창업주가 다닌 이 학교의 소나무는 부자의 기운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부자 나무’로 불린다. 올해 처음 열린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을 찾은 47국 출신 150여 외국인은 삼성·LG·GS·효성 창업주들이 교류한 승산마을을 둘러봤다. /진주시

먼저 인구 감소로 폐교돼 9년간 텅 빈 채로 방치돼 있던 지수초등학교를 ‘K기업가정신 교육센터’로 고쳐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 지난 1년여간 4만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진주시는 승산마을과 “3대 거부가 나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남강의 ‘솥바위’, 경남 의령 정곡면 이병철 회장 생가와 경남 함안 군북면 조홍제 회장 생가까지 남강에 인접해 있는 장소들을 묶어 ‘진주 남강 부자 로드’를 조성해 관광 벨트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조규일 진주시장은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세계에 확산하는 일은 진주시만의 일이 아니고, 진주시만의 힘으로는 부족한 만큼,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