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 시각) 뉴멕시코주 벨렌에 있는 아르코사 풍력 타워를 방문해 경제 정책 ‘바이드노믹스’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이날 미 행정부는 반도체지원법 시행 1년의 성과와 함께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컴퓨터 등 첨단 기술 3종의 대(對)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로이터 뉴스1

9일(현지 시각) 미 백악관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컴퓨터 등 첨단 기술 3종 관련 대(對)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하고, “우려 대상국(중국 본토, 홍콩 및 마카오)의 군사, 정보, 정찰 능력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는 기술 및 제품에 대한 거래에 미국인이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을 중국이 반도체 재료인 갈륨·게르마늄 수출 제한으로 맞서자 미국이 중국 첨단 기술 개발로 향하는 돈줄을 옥죄는 형국이다.

중국이 즉각 반발하는 가운데 규제 효과를 확대하기 위해 미국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맹국에 대한 동참 압박을 강화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미국은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강화 조치 때에도 지난해 10월 독자적으로 발표한 뒤, 이후 일본과 네덜란드 등의 동참을 요구해 관철했다. 미·중 갈등 속에 국익을 감안한 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양인성

◇바이든, ‘핀 포인트’로 中 가장 아픈 곳 때려

백악관의 행정명령에 대해 중국은 “미국은 습관적으로 국가 안보를 무기화한다”며 “중국의 권익을 수호할 것”이라며 반발했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투자를 막는 방식으로 중국 기술 발전을 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방자한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투자 업계에서는 “바이든 정부가 중국이 가장 절실한 분야를 골라 때렸다”라는 평이 나온다. 실리콘밸리의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 양자컴퓨터 분야는 미국의 자본이나 기술 도움 없이는 후발주자인 중국이 따라잡지 못하는 분야”라고 했다. 앞서 미 공화당에선 전기차·생명공학·에너지 등의 분야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미 중국의 기술력이 성숙하거나 당장 국가 안보에 지장을 줄 기술은 아니라는 판단에 ‘핀 포인트’로 규제하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 테크업계에서도 ‘돈도 문제지만 기술 협업을 할 수 없는 게 아킬레스건’이라는 평이 나온다. 중국이 과거 세계 주요 자동차 브랜드와 합작해 자동차 산업을 키운 것 같이 지난 수십년간 구사해온 ‘시장환기술(시장을 내주고 기술을 가져온다)’ 전략을 구사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번 행정명령은 미·중 양국 기업이 합작법인을 세우는 것은 물론, 미국 기업이 중국에 시설투자를 하는 것까지 규제 범위에 포함해 중국이 더는 외국 기업의 기술을 배울 방법이 없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자금 수혈이 절실한 중국 초기 기술 스타트업들은 이번 조치로 큰 타격을 입게 될 전망이다. 조지타운대 연구에 따르면, 미국 투자자들은 2015~2021년 7년 동안 중국 AI 스타트업에 총 402억달러(약 53조원)를 투자했다. 같은 기간 중국 AI 기업이 유치한 전체 금액(1100억 달러)의 37%에 해당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 시각) 뉴멕시코주 벨렌에 있는 아르코사 풍력 타워를 방문해 경제 정책 ‘바이드노믹스’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이날 미 행정부는 반도체지원법 시행 1년의 성과와 함께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컴퓨터 등 첨단 기술 3종의 대(對)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AP 연합뉴스

◇동맹국 동참 요구할 듯…호재로 삼아야

미국인과 미국 기업에 대한 규제라는 점에서 당장 국내 기업과 투자자에 영향은 없겠지만, 중국 첨단 기술의 숨통을 끊기 위해 미국이 전방위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맹국 동참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 관계자는 “다음 주 한·미·일 3국 정상 간 회담을 감안해 날짜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행정명령과 관련한 구체적인 협력 방안이 정상 회담에서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한 뒤 이 분야에서 기술력이 뛰어난 일본과 네덜란드의 동참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일본은 지난달부터 중국에 대한 대중 수출 규제를 시작했으며, 네덜란드는 다음 달부터 자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 특정 장비를 수출할 때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조치를 시행한다.

중국이 보복 조치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한국도 신중한 접근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방침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면서도 “향후 미·중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중립 외교, 중립 통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이런 조치가 우리에겐 호재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의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시행으로 우리 태양광·배터리 업계가 반사이익을 얻은 것처럼 AI나 반도체 분야 한국 스타트업들이 미국 자본의 투자처로 부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