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넘게 이어온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오일 동맹’이 삐걱거리면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 원유 수급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한마디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하던 사우디는 이제 미국의 증산 요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와 함께 감산에 나섰다. 반면,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미국과 적대 관계를 이어온 이란이 오히려 생산량을 크게 늘리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원유 공급을 두고 사우디·러시아의 ‘감산 동맹’과 미국·이란의 ‘증산 연합’이 부딪치는 형국이다. 양 진영의 공방 속에 수요 전망마저 불확실성을 더하면서 국제 유가가 출렁이고 있다.

그래픽=양진경

◇사우디·러 vs. 미·이란

17일 국제 에너지 기구·단체들의 연합체 JODI(Joint Organisations Data Initiative)에 따르면, 지난 6월 사우디의 석유 수출은 3개월 연속 감소하면서 2021년 9월 이후 21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 기간 사우디의 원유 수출 물량은 하루 기준 총 680만 배럴로 5월보다 1.8%, 전년 같은 달보다 5.4% 줄었다. 원유 생산량도 지난 6월 996만 배럴로 줄어들며 19개월 만에 최저로 주저앉았다.

사우디와 함께 산유국 연합체인 오펙 플러스(OPEC+) 회원국인 러시아는 지난 6월 원유 해상 수출 물량이 전월보다 10% 줄어든 하루 346만 배럴을 기록하면서 지난 2월 이후 최저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S&P글로벌은 “러시아가 3월부터 하루 50만 배럴씩 감산 계획을 밝힌 뒤 6월 들어 수출이 실제로 줄었다”고 했다.

반면 그동안 ‘앙숙’ 관계였던 미국과 이란은 원유 생산을 나란히 늘리고 있다. 지난 8일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올해 미국의 원유 생산량을 지난해보다 하루 기준 85만 배럴 늘어난 1276만 배럴로 예측했다. 이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지난 2019년 하루 1230만 배럴을 넘어서는 규모다. 지난 5월 하루 기준 생산량은 전년보다 7.3% 늘어난 1266만 배럴을 웃돌았다. 이란도 한때 하루 220만 배럴까지 낮아졌던 석유 생산량을 310만 배럴까지 늘렸다. 이란의 원유 생산량은 트럼프 정부가 핵 협정을 탈퇴하고 제재를 강화한 지난 2018년 이후 가장 많은 수준이다.

그래픽=양진경

◇상승하던 유가는 다시 주춤

유가 상승이 국부 증가로 이어지는 사우디와 러시아가 잇따라 감산을 통해 유가 부양을 노리자, 미국과 이란이 생산과 수출을 늘리며 여기에 맞서는 모양새다.

특히 이란산 원유 수출 물량의 상당수는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으로 향하면서 국제 유가 흐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명예선임연구위원은 “중국이 시장 가격보다 낮은 수준에서 이란산 원유를 들여오면서 국제 유가를 누르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유 증산 국면에서 한 배를 탄 미국과 이란은 최근 죄수 맞교환까지 합의하면서 해빙 분위기를 맞고 있다. 이석기 한국석유공사 정보분석팀장은 “제재를 피해 암암리에 진행돼온 이란산 원유 수출을 당분간 미국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고 전했다.

한편 지난 9일 잇따른 감산 소식에 올 들어 최고치인 배럴당 84.4달러를 기록했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16일 수요 둔화 우려와 함께 79.38달러로 주저앉았다.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커지며 내년 상반기까지 유가가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많지만, 중국의 경기 회복이 늦어지면서 수요가 둔화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박희준 EIP자산운용 대표는 “사우디와 러시아가 잇따라 감산에 나서며 유가를 떠받치려는 움직임을 앞으로 수요 감소를 대비한 결정으로 해석하는 관측도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