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5일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의 ‘차세대 배터리 연구소’가 있는 서울 마곡 LG 사이언스센터. ‘촬영을 안 하겠다’는 보안 서약서를 쓴 뒤, ‘꿈의 배터리’라 부르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부 내부에 국내외 언론 처음으로 들어갔다. 좁은 복도를 따라 양옆으로 각종 실험실이 칸칸이 이어졌다. 실험실은 통유리창으로 내부가 보였다. 한 실험실 안에서 연구원 한 명이 흰 방진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 검은 가루를 저울에 올려 놓고 측정하고 있었다. 손권남 LG엔솔 차세대배터리연구소장은 “전고체 배터리의 전극을 만들려고 활물질·도전재·바인더를 섞어 무게를 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실험실엔 방앗간에서 쓸 법한 대형 믹서가 있었다. 손 센터장은 “배터리 공정은 핵심 재료를 잘 섞어 슬러리(반죽)를 만드는 점에서 떡 만들기와 비슷하다”며 “특히 전고체 배터리는 전해질이 고체라서 참기름을 짜내듯 사방에서 압력을 가해야 이온 전도도(이온의 이동성)가 높아진다”고 했다. 이어 “전고체 배터리는 수년 안에 대중화될 것이고, LG가 그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LG엔솔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배터리 업체다. 1992년 이차전지 개발에 착수해 31년간 배터리 특허만 2만7000여 건을 보유하고 있다. 덕분에 이차전지는 한국이 드물게 ‘특허’ 기득권을 갖고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지금 세계 산업 생태계는 거대한 풍랑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큰 시장’에 머물던 중국과 인도 등이 강력한 기술 경쟁자로 돌변한 건 오래 됐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라는 신냉전의 새로운 지구촌 현상 앞에서 수십 년간 유지돼 온 전 세계 공급망은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미국과 EU, 일본은 ‘제조업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붓는 무한 경쟁에 들어갔다. 미국은 반도체법과 IRA(인플레감축법) 시행 후 270조원의 제조업 투자를 유치했고, EU는 62조원을 투입하는 유럽 반도체법을 도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경제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저성장기에 접어든다는 우려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본지는 한국 경제의 복합 위기에 우리 미래를 책임질 ‘뉴 엔진’의 산업 현장을 찾아 그 해법을 도모했다. 대부분 최초로 공개하는 현장 속에서 우리 경제의 희망을 찾고자 한다. 본지는 시리즈를 위해 국내 최고 과학기술 석학이 모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교수 100명에게 한국 산업 경쟁력 진단을 요청했다. 석학들은 우리 반도체·석유화학·이차전지 등 주요 산업이 중국·대만·일본의 추격을 당하고, 인공지능·양자컴퓨터 같은 미래 먹거리에선 한참 뒤처져 있다고 평가했다. 한 석학은 “지금 베짱이처럼 일하는 한국인들은 결코 중국인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며 “중국인이 죽기 살기로 일하고, 모방을 토대로 창의성을 더하는 건 그렇게 하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몸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본지는 전고체 배터리 현장을 시작으로, 친환경 선박, 자율주행, 재활용 플라스틱, SMR(소형 모듈 원자로) 등 차세대 산업 현장을 공개하고 국제 경쟁력을 진단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반도체보다 커지는 815조 배터리 시장… LG·삼성·SK·현대차 총력전
◇극건조 실험실에서 고무장갑 끼고 작업
전고체 배터리 개발 현장을 세계 최초로 공개하기로 한 LG가 기자에게 먼저 요구한 것은 ‘보안 교육’과 ‘보안 각서’였다. 이어 검색대를 통과한 뒤에야 3층 전고체 배터리 개발 현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3층의 전고체 배터리를 위한 또 다른 실험실 문 앞에는 이슬이 맺히는 온도를 뜻하는 ‘노점’이 -44.8Td라고 쓰여 있었다. 수분이 거의 없다는 의미로, 극건조 상태다. LG가 개발 중인 ‘황화물계 전고체 배터리’는 수분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런 ‘드라이룸’에서 실험한다고 했다. 이곳엔 검은 고무장갑이 달려있는 커다란 투명 상자 ‘글러브 박스’가 있었다. 고무장갑을 통해 상자 안으로 손을 넣은 연구원들이 전고체 배터리를 만들 재료들을 섞고 있었다. 수분과 먼지가 침투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작업하는 것이다. 김나윤 연구원은 “장갑을 끼는 작업이 꽤 불편하지만 한 달 단위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삼성 SDI도 전고체 파일럿 ‘S라인’ 구축
차세대 배터리 산업에서 한국이 갖는 강점은 LG엔솔, 삼성SDI, SK온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3총사에다 배터리의 최대 수요처인 현대차그룹도 직접 배터리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SDI도 전고체 배터리의 ‘메가 트렌드’인 황화물계를 연구 중인데, 한국 3사 중 가장 도전적인 전고체 배터리 목표를 잡았다. 지난 3월 말 수원연구소에 ‘S라인’으로 명명한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공장을 국내에서 처음 갖췄고, 지난 6월 샘플 제작에 성공했다. 삼성은 특히 음극 없이 양극만으로 배터리를 만드는 ‘무음극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음극에서 생성되는 ‘덴트라이트’ 현상을 차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덴트라이트는 금속 표면에 비정상적으로 자라는 나뭇가지 형태 결정으로, 배터리 화재와 수명 단축의 원인이 된다. 박규성 SDI연구소 차세대개발팀장(상무)은 “소재·셀·공정에서 핵심 기술을 선점해 2027년 대량생산에 들어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일본 도요타가 제시한 전고체 배터리 양산 시점인 2027~2028년과 비슷하다.
SK온도 내년 상반기 파일럿 라인 완공, 2028년 양산을 목표로 전고체 배터리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 4월 대전 배터리 연구원 R&D에 47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기술 개발을 위해 해외 교수진은 물론 해외 스타트업들과도 적극 협업하고 있다. 고무 형태 고체 전해질을 개발한 이승우 미 조지아 공대 교수, 미국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받는 전고체 배터리 스타트업 솔리드파워가 SK의 파트너다.
현대차도 자체 기술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2021년 말 남양연구소 산하 ‘배터리개발센터’를 개설, 배터리 시스템·셀 설계뿐 아니라 전고체 배터리도 연구하고 있다. 지난 6월 전기차 전략인 ‘현대차 모터 웨이’ 발표 때 10년간 9조5000억원을 배터리 성능, 차세대 배터리 선행 기술 개발에 쓰겠다고 했다.
배터리 전문 조사 업체 SNE리서치는 2035년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 규모를 815조원으로 전망한다. 지난해 반도체 시장 규모가 630조원(약 4800억달러·세계 반도체 시장 통계 기구 자료)임을 감안하면, ‘제2의 반도체’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전고체 배터리
적은 용량으로도 전기차 주행거리 1000㎞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꿈의 배터리’로 불린다. 현재 대중화된 리튬이온 배터리는 액체 상태 전해질을 쓰기 때문에 충격·열이 가해지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화재가 날 수 있고, 수명도 상대적으로 짧다. 반면 전고체 배터리는 전해질을 고체로 만들기 때문에 변형돼도 화재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