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웽’ 하는 경보와 함께 검붉은빛을 띠는 잉곳이 크레인에 매달린 채 앞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탱크처럼 생긴 장비의 집게에 고정된 잉곳은 곧이어 1만7000t급 프레스에 눌리고 두드려졌다. 금속을 때리는 소리는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컸고, 1000℃에 이르는 잉곳이 내뿜는 열기는 안전선 밖 기자가 사우나에 있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후끈했다. 배민근 두산에너빌리티 팀장은 “프레스의 압력은 성인 남성 24만명이 누르는 힘과 같다”며 “합금강으로 된 집게지만 이런 압력과 열이 이어지면 금이 갈 수밖에 없어 한 번에 40분밖에 작업을 못 한다”고 말했다.

미국 뉴스케일파워는 소형 모듈 원전(SMR) 건설을 추진하면서 가장 핵심인 원자로 모듈은 두산에 맡겼다. 1970년대 말 고리 2호기를 시작으로 지난 40여 년간 설비 제작 분야에서 쌓은 경험이 차세대 원전인 SMR 시장에서도 가장 강력한 글로벌 생산 기지의 지위를 노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지난 5월 23일 경남 창원 두산에너빌리티 주·단조 공장에서 뉴스케일파워의 소형모듈원전(SMR)에 들어갈 부품이 제작되고 있다. 성인 남성 24만명이 누르는 힘과 같은 1만7000t급 프레스로 합금 원기둥(잉곳)을 두드리고 누르는 과정을 반복한 뒤, 성형과 열처리, 검사, 용접을 거쳐 원자로 용기가 탄생한다. 두산에너빌리티를 비롯한 국내 원전 업계는 지난 40여년 동안 쌓은 기술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성장이 기대되는 글로벌 SMR 시장에서 생산 기지 역할을 노리고 있다. /제작=스튜디오 광화문, 자료=두산에너지빌리티·뉴스케일파워

◇한국, 전 세계 SMR의 ‘파운드리’ 노려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은 지난 3월 초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에서 “우리는 반도체로 치면 파운드리(위탁 생산) 같은 역할을 원전 분야에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500여 고객이 맡긴 설계에 따라 반도체를 생산하며 삼성전자 반도체를 매출에서 넘어선 대만 TSMC처럼 지난 40여 년간 대형 원전에서 쌓은 실력과 400여 중소·중견 업체로 구성된 원전 생태계를 바탕으로 전 세계 SMR 파운드리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 사고 이후 미국과 유럽 각국이 원전 건설을 수십여 년 중단했지만, 국내 기업들은 원전을 꾸준히 건설해왔다. 두산에너빌리티를 비롯한 국내 원전 설비 업체들은 1980년대 한빛 3·4호기에 원자로를 공급한 것을 시작으로 UAE(아랍에미리트) 바라카 1~4호기, 새울 3·4호기(신고리 5·6호기)까지 모두 원자로 34기를 제작했다. 중국 하이양 1호기, 산먼 1호기, 미국 VC서머 2·3호기, 보글 3·4호기에는 핵심 기자재를 납품했다.

지난 5월 23일 경남 창원 두산에너빌리티 주·단조 공장에서 뉴스케일파워의 소형모듈원전(SMR)에 들어갈 부품이 제작되고 있다. 성인 남성 24만명이 누르는 힘과 같은 1만7000t급 프레스로 합금 원기둥(잉곳)을 두드리고 누르는 과정을 반복한 뒤, 성형과 열처리, 검사, 용접을 거쳐 원자로 용기가 탄생한다. /두산에너빌리티
뉴스케일파워가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2029년부터 상업 운전을 시작할 예정인 소형 모듈 원전(SMR)의 조감도. 미술관 같은 외관이지만 내부엔 원자로가 설치된다. /뉴스케일파워

지난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며 일감 부족에 시달렸던 원전 업계로서는 절박한 상태에서 두드렸던 SMR 시장이 최근 에너지 위기 국면에서 주목받으며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신고리 5·6호기 물량까지 끊어지자 2019년부터 공장 가동률이 50%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앞으로 한국에서 원전은 더 짓지 않겠다는 상황에서 원자로·증기발생기 분야 등의 핵심 인력과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찾은 돌파구가 SMR이었다”고 말했다.

강재열 전 한국원자력산업협회 부회장은 “SMR은 설계·개발 회사는 많지만 정작 기기를 공급하고, 건설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며 “공급망이 재편되는 가운데 서방세계에서 SMR을 적기에 제작·시공할 실력을 갖춘 나라와 기업은 우리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하경

◇삼성·SK·현대차·포스코 등 대기업 잇따라 뛰어들어

SMR이 미래 먹거리로 떠오르면서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력을 쌓아온 국내 기업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지난 7월 열린 ‘SMR 얼라이언스’ 출범식에는 삼성·SK·현대차·포스코·GS·HD현대·두산·DL 등 국내 주요 원전 관련 업체 경영진이 총출동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국내 10대 그룹 계열사는 절반이 넘는 6곳, 한화도 한화오션(대우조선해양)이 인도네시아에서 해상 SMR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감안하면 10대 그룹 중 7곳이 SMR에 뛰어들었다.

글로벌 SMR 시장이 2035년까지 5000억달러(약 650조원) 규모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자 그룹마다 신성장 동력 중 하나로 SMR을 선정하고 기회를 모색하는 것이다.

SK그룹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설립한 미국 테라파워가 2030년 완공을 목표로 미 서부 와이오밍에 구축하는 345MW급 실증 단지에 참여하고 있으며, 고리 1·2호기부터 원전 건설에 참여한 현대건설은 미국은 물론 미국 홀텍인터내셔널이 우크라이나에서 추진하는 SMR의 시공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DL이앤씨(옛 대림산업)도 올 1월 미 엑스에너지에 2000만달러를 투자하고 함께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조선업에서도 HD한국조선해양은 테라파워와 3000만달러 규모 투자 계약을 맺었고, 삼성중공업은 덴마크의 시보그와 부유식 SMR 개발에 나서고 있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는 “대형 원전에서 수십년 동안 기술력을 쌓은 국내 대·중소기업들은 반도체 산업의 대만 TSMC처럼 SMR 제조에 특화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