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 강서구 코오롱 원앤온리타워에서 열린 제23회 우정선행상 시상식에서 우정선행상 수상자와 심사위원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코오롱 제공

“사업이 부침을 겪으며 야학 운영이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단 한 번도 학교 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늘 있으니까요.”

고(故) 박학선 상록야학 교장은 생전에 “학생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성장하는 것처럼 마음이 좋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47년째 늦깎이 학생들의 배움터가 되어준 상록야학이 코오롱그룹 오운(五雲)문화재단이 선정하는 제23회 우정(牛汀)선행상 대상을 받았다. 우정선행상은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온 봉사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2001년 만들어졌다. ‘오운’은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우정’은 이동찬 선대회장의 호(號)이다.

19일 열린 우정선행상 시상식에서 상록야학의 2대 교장이자, 설립자인 박학선 교장의 아내인 한윤자 교장은 “남편 장례식에 이 학교를 거쳐 간 분들이 정말 많이 찾아와 소중한 추억들을 들려주고 가셨을 때 남편이 상록야학을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이유를 제대로 알았다”며 “우정선행상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게끔 격려해주는 뜻깊은 상”이라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는 상록야학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다. 1년제 초교 과정, 2년제 중·고교 과정을 비롯해 한국사, 한문 등 다양한 수업을 남녀노소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다. 최첨단 기술 발전 속도에 뒤처져 어르신들이 사회에서 소외당하지 않도록 생활 영어, 컴퓨터 등 실생활에 유용한 내용을 가르치는 ‘열린 강좌’도 있다. 또 계절마다 체육대회, 수학여행, 상록의 밤, 일일 호프 행사를 통해 만학도들에게 학창 시절의 추억도 선물한다.

상록야학 설립자인 박 교장은 1976년 서울 이문동사무소 회의실에 교실을 처음 마련했다. 운영하던 기성 양복 사업이 번창하자, 전쟁고아가 되어 배움의 기회를 놓친 이들, 가정 형편이 어렵고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가보지 못한 이들을 돕고 싶었다고 한다. 박 교장 역시 빈농 가정에서 자라 제때 배움을 마치지 못한 아픔이 있었다. ‘야학을 연다’는 벽보를 보고 만학도 36명이 입학했고, 서울 동대문구 동사무소 직원들과 지역 내 대학생 등 6명이 교육 봉사 형태로 야학을 열었다.

1977년 열린 상록야학 제2회 입학식에서 고(故) 박학선 교장이 학생들에게 축사를 하고 있다. 1976년 문을 연 상록야학은 지난 47년간 8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 교장은 생전 “배움이 필요한 사람은 늘 있다”며 “이들을 위해 상록야학이 언제나 존재하길 바란다”고 했다./코오롱그룹

지금까지 상록야학에선 8000명 가까운 졸업생이 나왔다. 지금도 50~80대 만학도 100여 명이 못다 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4월 고졸 검정고시에선 78세의 최고령 합격자를 배출했다. 그간 상록야학을 거쳐 간 교육 봉사자도 1300명에 이른다. 이들 중엔 상록야학에서 배운 ‘나눔의 가치’를 되갚기 위해 다시 찾은 졸업생도 많다. 박용준 교사는 상록야학에서 공부한 뒤 1992년 이 학교로 돌아와 지금껏 학생들을 가르친다. 컴퓨터 관련 일을 하는 김동철(48) 교사도 상록야학에서 공부한 졸업생 자원봉사자다. 황기연 교무부장은 서울시립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82년부터 지금껏 봉사를 41년째 이어왔다.

박 교장은 지난해 10월 지병으로 별세하기 직전 자신이 입원 중이던 병원에 3억원을 기부하며 나눔을 실천했다. 박 교장은 생전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제때 배우지 못한 이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라며 “적은 수라도 이들을 위해 상록야학이 언제나 존재하길 바란다”고 했다. 아내였던 한 교장이 박 교장의 뜻을 잇기 위해 2대 교장이 됐다.

이날 시상식에선 18년째 무연고 고인들의 장례를 치러준 강봉희(70)씨, 온갖 질병과 사투하면서도 42년간 이·미용 봉사를 이어온 김정심(77)씨, 청각장애인 가족들의 소통을 도와왔던 수어 통역 봉사단 ‘손으로 하나되어’가 본상을 받았다.

이웅열 오운문화재단 이사장은 “수상자들은 타인을 위해 각자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사랑을 실천해 오셨다”며 “여러분이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에 경의를 표하며 여정에 우정선행상이 새로운 원동력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