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은 방위사업청을 상대로 제기한 700억원대 민사 소송에서 지난달 7일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9부(부장 한정석)는 방위사업청이 대한항공에 473억4700여만원을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이 소송은 대한항공이 방위사업청에게 낸 ‘지체상금’ 725억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이다. 지체상금은 납품 예정 기일에 비해 실제 납품 날짜가 늦었을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의미의 돈이다. 대한항공은 2013년 3월 해상초계기 성능 개량 사업을 방사청에서 수주했고, 성능 개량을 끝낸 초계기 8대를 2016년 7월부터 순차적으로 방사청에 납품했다. 하지만 2016년까지인 사업 완료 기한이 1393일 지체됐다는 이유로 계약대금 4408억원에서 지체상금 725억원을 빼고 지급받게 되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대한항공은 납품이 지연된 것은 방사청의 귀책 사유가 더 크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시험 비행에 필요한 암호통신 시험 인력, 시험 비행 공역, 공항 시설 등은 정부가 통제하는 부분인데 군이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며 지체상금 상당 액수가 면제될 수 있다고 봤다.
국내 방산업계는 이처럼 방사청이 부과하는 지체상금이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데다 불필요한 소송전까지 야기한다고 본다. 한 방산업계 관계자는 “방산업계의 2019~2021년 3년 평균 영업이익률이 4%가 조금 못 되는 수준”이라며 “1000억원 계약을 수주하면 연간 영업이익이 40억원이 안 된다는 뜻인데, 정작 수주한 사업당 지체상금 수백억원씩을 물어야 한다면 방산 산업이 어떻게 차세대 먹거리가 되겠느냐”고 했다.
◇국내 최초 3000t급 잠수함, 장비 개발 석달 늦었다고 벌금 950억원
현행 규정에 따르면 지체상금은 지연 일수 1일당 계약 대금의 0.075%가 부과된다. 예를 들어 1000억원짜리 계약의 납품 일수가 10일 늦어졌을 경우, 7500만원×10으로 7억5000만원의 지체상금이 부과된다. 무기 연구·개발 사업에서 지체상금의 총액 한도는 전체 계약대금의 10%다.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2018~2022년 5년간 방산업체들에 부과된 지체상금 건수는 총 33건, 액수는 1조413억원에 달한다.
지체상금이 부과된 대표적 사례가 한화오션(당시 대우조선해양)이 개발한 국내 최초 3000t급 잠수함 도산안창호함이다. 이 잠수함에는 지체상금 948억원이 부과됐다. 총 개발 기간 8년에서 110일을 넘겼다는 이유로 전체 잠수함 건조 비용의 10%가 지체상금으로 부과된 것이다. 한화오션 측은 “일단 지체상금은 모두 납부했고, 이에 대한 민사 소송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한화오션은 이를 포함해 총 6건의 계약에서 약 2200억원의 지체상금을 부과받은 상태다.
지체상금은 방산업체들로 하여금 납기일을 지켜 군의 전력 누수를 막고자 하는 취지다. 하지만 무기 신규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변수를 적용하고 있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무기 연구·개발 사업의 경우 기존에 없던 무기를 새로 개발하는 과정이니만큼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고, 관련 시험에 필요한 군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스케줄이 지연되는 사례도 많다”며 “현재 방사청은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날짜에 따라서만 지체상금을 부과하고 있다”고 했다.
◇”지체상금 내고 소송으로 돌려받는 게 관행”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방사청의 소극적 규정 적용이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천재지변, 정부 시책 등으로 제조가 중단되거나 해외에서 공급되는 부품 납품이 늦어지는 등의 이유가 있을 시 이에 해당하는 날짜만큼 지체상금을 면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의무가 아니라 재량 사항으로 규정돼 있기 때문에, ‘봐주기 논란’ 등을 우려한 담당 공무원들이 이를 적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 때문에 무기 개발이 지연되면 방사청이 먼저 지체상금을 부과하고, 이에 불복한 기업들이 소송을 통해 지체상금을 돌려받는 게 관행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라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해외 국가도 지체상금의 산정 방식이나 요율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기를 인도받을 때 계약 대금에서 지체상금을 상계해 지급하는 한국과 달리, 유럽 국가는 해당 무기를 인도받기에 앞서 먼저 개발 업체와 지체상금 관련 협상을 거친다. 해외에서 무기 개발을 수주해 납품한 경험이 있는 한 방산업체 관계자는 “개발이 지연된 사유에 대해 업체가 소명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송을 제기할 필요가 크게 줄어든다”고 했다.
이처럼 지체상금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면서 관련 규정도 점차 바뀌고 있다. 지난달 21일에는 지체상금 제도의 개선 내용을 담은 방위사업법 개정안이 국회 법사위에서 통과돼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있다. 이 개정안에는 기업들이 추진 중인 국방기술 개발이 국내에서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인정될 경우 지체상금을 깎아주거나 계약 자체를 변경하는 것을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방사청 관계자는 “국내 방산업체들이 도전적으로 연구·개발을 수행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위해 법적·제도적 개선을 지속 추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