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체르나보다 원전 전경. 오른쪽에 있는 시설이 한수원과 캐나다 캔두에너지, 이탈리아 안살도 컨소시엄이 설비 개선 작업을 수주할 체르나보다 1호기다. 1996년 가동을 시작한 1호기는 2026년 1차 운영 허가 기간인 30년을 마치고 설비 개선을 시작할 예정이다. 사진 속 왼쪽 시설은 체르나보다 2호기다./한국수력원자력

우리나라가 1조원 규모의 루마니아 원전 설비 개선 사업을 수주하게 됐다.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 탓에 완전히 막혔던 원전 수출이 이번 정부 들어 재개되며 원전 산업에도 숨통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작년 8월 이집트 엘다바 원전, 같은 해 10월 폴란드와 한국형 원전 협력의향서(LOI) 체결 등에 이어 이번에도 조(兆) 단위 규모의 설비 개선 사업을 따내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 수주에는 지난 정부가 수명이 남았는데도 조기 폐쇄하며 탈(脫)원전 상징이 된 월성 1호기에서 쌓아 온 경험과 기술력이 바탕이 됐다.

한국수력원자력은 12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루마니아원자력공사(SNN)에서 캐나다의 원자로 설계 회사 캔두에너지, 이탈리아의 터빈·발전기 설계사 안살도뉴클리어와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1호기 설비 개선 사업 공동 수행을 위한 3자 컨소시엄 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1996년 루마니아 최초로 상업 운전을 시작한 체르나보다 1호기를 30년 더 운전하기 위해 2027년부터 설비·부품을 교체하는 사업이다. 3자 컨소시엄이 사업을 주도하는데 내년 상반기 루마니아원자력공사와 최종 계약을 맺는다. 총사업비는 18억5000만유로(약 2조5000억원)로 한수원과 한전KPS, 두산에너빌리티 등 우리 기업들은 40%인 1조원을 수주하게 되는 것이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대기업은 물론 국내 원자력 중소·중견 기업들도 사업에 참여하면서 원전 산업 생태계 복원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의균

한수원이 참여하는 3자 컨소시엄은 2027년 1월부터 2029년까지 32개월 동안 체르나보다 1호기의 압력관(핵분열이 일어나는 공간)과 터빈·발전기의 구성품 교체 등을 포함한 대규모 설비 개선 작업을 진행한다. 2026년 12월까지 1차 운영 허가 기간 30년이 끝난 체르나보다 1호기를 30년 더 운전하기 위한 작업이다.

◇국내 원전 업계 기술력 높은 평가

해당 원전은 우리나라 월성 1~4호기와 같은 캔두형(중수로)으로 이번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캐나다 캔두에너지(옛 AECL)가 설계하고, 이탈리아 안살도가 터빈과 발전기 등을 설계했다. 캔두에너지와 안살도는 각각 원자로와 터빈·발전기 계통의 설계와 기자재 구매를, 한수원과 국내 기업들은 전체 시공 및 방사성 폐기물 보관 시설 등 인프라 건설을 맡는다. 한전KPS와 두산에너빌리티는 시공은 물론 일부 기자재를 공급하고, 현대건설과 삼성물산은 방폐물 보관 시설, 업무용 건물 등 인프라 건설을 담당한다.

1978년 고리 1호기 상업 가동 이후 쌓아온 국내 원전 업계의 기술력과 경험이 이번 수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2009년 월성 1호기 설비 개선 작업 당시 압력관 교체 작업을 27개월 만에 끝낸 실적이 원전 설계 회사인 캐나다 업체에서 러브콜을 받는 원동력이 됐다. 캐나다(포인트레프로 원전)와 아르헨티나(엠발세 원전)는 압력관 교체에 각각 46개월, 37개월이 걸렸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캔두형 원전을 설계한 캐나다조차 수차례 압력관 교체에 실패하며 작업이 지연됐는데, 우리는 월성 1호기 때 한 번 만에 성공했다”며 “꾸준히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하면서 쌓은 경험이 이번 수주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내 공급망 바탕으로 수출 확대 꾀해야

탈원전을 폐기한 윤석열 정부가 원전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8월 3조3000억원 규모 이집트 엘다바 원전 사업 수주에 성공한 데 이어 폴란드와 한국형 원전 LOI 체결, 루마니아 삼중수소 제거 설비 건설 사업 계약 등을 잇따라 따냈다. 러시아 업체가 이집트에 건설하는 원전 4기에 기자재를 공급하고, 80여 건물·구조물을 짓는 엘다바 사업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대(對)러시아 제재 등 돌발 변수로 진통을 겪었지만, 최종 계약을 맺었다. 지난 6월 단일 설비 수출로는 최대 규모인 루마니아 원전 삼중수소 제거 설비(2600억원) 수주를 통해선 국내 기자재 업체에 24종 1000억원 규모의 발주 효과를 거뒀다.

업계에선 원전 설비뿐 아니라 UAE(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같은 한국형 원전(APR-1400) 수출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원전 10기 수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폴란드 퐁트누프 원전 사업(10조~30조원), 9조원 규모로 예상되는 체코 두코바니 원전 입찰이 진행 중이다. 신한울 3·4호기 착공, 신규 원전 건설 추진과 함께 계속 운전과 원전 수출이 속도를 내면 고사 위기까지 갔던 원전 생태계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커진다.

정용훈 KAIST 교수는 “신규 원전과 계속 운전 등을 통해 국내 원전 생태계와 공급망을 튼튼하게 유지하면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경쟁력 우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며 “적기 시공과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국형 원전 수출도 더 속도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