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부터 대기업과 중견 기업이 사용하는 전기요금이 kWh(킬로와트시)당 10.6원(6.9%) 오른다. 가정과 소상공인, 중소기업의 전기 요금은 현 수준을 유지한다. 전기요금 인상을 발표한 한전은 또다시 1조원 규모의 자구 대책을 내놨다. 작년 5월부터 네 번째다. 총부채가 200조원을 웃돌고, 2021년부터 누적 적자가 47조원을 넘어서며 최악의 위기에 빠진 한전의 재무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요금 인상을 두고선 ‘숨만 붙여 놓는 수준’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한전 자구안에 대해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엔 턱없이 부족한 ‘맹탕’이라는 지적이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눈치 보기 찔끔찔끔’ 전기 요금 인상과 ‘등 떠밀린 보여주기’ 자구책이 되풀이되며 한전 재무 상황은 더 악화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난방 수요가 많은 겨울을 앞두고 가스 요금은 동결했다. 가스공사는 한전보다 부채 비율이 높아 재무 상황이 더 심각한 상황이다.
◇대기업·중견기업용 전기 요금만 인상
한전과 산업통상자원부는 “9일부터 산업용(을) 전기 요금을 kWh당 평균 10.6원 올린다”고 8일 밝혔다. 중견기업(고압A) 요금은 6.7원, 대기업 계열 대형공장(고압B·C)은 13.5원 올린다. 가정에서 쓰는 주택용, 식당·상점 등 일반용, 중소기업 대상인 산업용(갑)은 동결했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쓰는 전력 사용량은 전체의 48.9%에 이른다.
가정·소상공인·농민 등 전체 전기 요금을 올렸다면 kWh당 5원 인상과 비슷한 효과다. 한전이 이자와 원금을 갚기 위해 필요하다고 추산한 인상 폭(25.9원)의 5분의 1수준이다. 이번 인상으로 연말까지 남은 50여 일 동안 기대되는 적자 감소액은 4000억원에 그친다. 내년 한 해 2조8000억원 플러스 효과인데 이는 내년에 천문학적인 부채로 내야 하는 이자(5조원)의 절반 정도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현재 한전의 회사채 발행잔액과 연말 적자 예상액 등을 계산하면 간신히 부도만 모면하는 수준의 요금 인상”이라며 “재무 구조는 개선하지 못하고, 간신히 숨만 붙여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에도 맹탕 자구 대책
한전이 이날 ‘제2창사라는 절박한 심정’이라며 내놓은 총 1조원 규모 자구 대책을 두고서도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전은 이날 서울 공릉에 있는 인재개발원 부지를 팔고, 100% 자회사인 한전KDN 지분 20%를 매각해 총 1조원을 확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실현 불가능하다. 녹지가 99%로 시가 2500억원인 인재개발원 부지의 용도를 바꾸고 땅 밑을 지나는 고압선로를 옮겨 7800억원에 매각하고, 한전KDN을 증시에 상장해 지분 일부를 1300억원에 팔겠다는 것인데 매각이 성사되더라도 수년이 걸릴 일이다.
인력 감축을 통한 고통 분담은 자구안에 거의 담기지 않았다. 본사 조직을 8본부에서 6본부로 20% 줄이겠다고 했지만, 인력 전환 배치에 불과하다. 또 원전 수출 등에 추가로 필요한 800명을 증원하지 않겠다는 계획도 현재 인력 축소와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맹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연말까지 488명 축소도 지난 5월 발표한 정원 감축을 재탕한 것이다. 인력 감축은 2026년까지 자동화에 따른 700명 운영 인력 감축뿐이다. 전체 인원(2만3000명)의 3%에 불과하다. 한전은 창사 이래 두 번째로 희망 퇴직을 실시하겠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시기나 규모는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