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내년도 예산 심사 과정에서 윤석열 정부의 핵심 에너지 정책인 원전 생태계 조성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탈원전으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망가뜨린 민주당이 현 정부의 원전 생태계 회복 예산을 전액 삭감하자, 원전 생태계를 두 번 죽인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SMR(소형 모듈 원전)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추진을 결정했고, 지난해 대선 땐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공약에 포함한 사업이어서 보복성 예산 삭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민주당은 신재생에너지와 문재인 정부 때 무리하게 추진해 설립된 한전공대 예산은 대폭 늘렸다.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 정책 예산마저 정쟁(政爭) 대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민주당은 20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SMR R&D, 원전 생태계 지원, 원전 수출 분야 예산 1820억원을 삭감한 내년도 산업부 예산안을 단독으로 의결했다. 여당은 이 같은 예산안에 반대해 회의에 불참했다. 산업부의 원전 관련 예산은 7500억원인데 방사성 폐기물 관련 예산과 원전 주변 지역 주민 지원, 국제 협약으로 매년 내는 국제핵융합실험로 분담금 예산 등 의무 지출 예산을 제외한 70%가 감액됐다. 중소벤처기업부의 R&D 예산 중 208억원도 원전 R&D라며 삭감했다. 이대로 예산결산위원회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내년 국내 원전 산업의 연구·개발은 멈추게 되고, 원전 생태계 복원도 요원해지게 된다는 우려가 커진다.
전 세계 17국이 뛰어들어 각축을 벌이는 SMR 예산은 333억원 모두 삭감됐다. SMR은 국고 지원에 민간 자금을 더해 올해부터 2028년까지 총 3992억원을 투입하기로 한 국책 사업이다. 하지만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내년부터 표류 위기에 처했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는 “SMR 개발을 위해 미국 정부가 투자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원전 예산 삭감은 에너지 정책 근간을 흔들고, 미래 먹거리를 스스로 없애겠다는 것”이라며 “탈원전처럼 에너지 정책을 다시 정쟁화하는 행태”라고 말했다.
지난 정부에서 벼랑 끝까지 몰렸던 원전 생태계를 살리고, 2030년까지 원전 10기 수출을 위해 내년부터 새로 편성된 이른바 ‘윤석열표 원전 예산’은 모두 삭감됐다. 민주당은 원전 중소·중견 기업에 저금리로 대출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 1000억원은 ‘지원 대상이 포괄적이고, 선정 기준이 불명확하다’며 뺐고, 원전 기업과 인력을 지원하는 112억원도 ‘원자력이 아닌 재생에너지 확대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는 이유로 전액 삭감했다. 또 내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는 신한울 3·4호기에 부품을 공급할 중소·중견 기업용 보증보험 지원 예산(58억원)도 모두 빠졌다.
탈원전을 추진하면서도 원전을 수출하겠다던 문재인 정부였지만 민주당은 원전 수출 지원을 위한 예산도 삭감했다. 원전 중소·중견 기업을 위한 수출 보증보험 발급 예산 250억원은 전액 삭감됐다. 당장 내년에 체코 원전 국제 입찰이 있고, 폴란드·영국·루마니아에서도 원전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차세대 원전 기자재 R&D를 위한 예산 60억원도 ‘재생에너지 R&D 예산이 과다 삭감됐다”며 모두 잘렸다. CF(무탄소 에너지) 연합 확산을 위해 배정한 6억원도 삭감했다. CF 연합은 원전을 포함해 ‘탄소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여건이 좋지 않은 우리나라 현실에서 ‘RE100(재생에너지 100%)’ 대안으로 국제사회에 제시한 것인데 민주당은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댔다.
반면 민주당은 지난 정부 탈원전 정책의 하나인 원전 해체 R&D 사업엔 애초 배정된 433억원에서 256억원을 추가로 늘렸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는 보급 지원 사업에 정부안보다 1620억원, 금융 지원 사업에는 2302억원 늘렸다. 한국에너지공과대(한전공대) 지원 예산도 167억원에서 127억원이 늘어난 294억원이 됐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지난 정부 탈원전과 신재생 확대로 인한 각종 부작용이 전기 요금 인상과 전력 계통 불안 등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야당에선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현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막아서면서 여전히 탈원전을 이어가겠다는 오기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