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6단체 상근부회장들이 지난달 18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노동조합법 개정안 입법 추진 중단 및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유예를 위한 회의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정만기 한국무역협회 부회장./뉴스1

정부와 여당이 50인 미만 중소기업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2026년까지 2년 동안 추가 유예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시행 두 달을 앞두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법 적용 시행일을 내년 1월 27일에서 2026년 1월 27일로 2년 늦추는 내용의 개정안이 여당의 발의로 국회에 계류돼 있지만, 야권의 반대로 법사위에 안건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정치권은 오는 29일 예정된 법사위 전체회의에 관련 안건을 상정해 논의한다는 방침이지만, 여야 간 의견 차가 커 법 통과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중소기업계는 법 개정이 무산되면 경기 불황으로 가뜩이나 경영 상황이 어려운 영세 사업장들이 안전 비용 부담으로 한계 상황에 내몰릴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그래픽=정인성

◇”아직 적용도 안 됐는데… 안전 비용만 수천만원”

부산에서 직원 45명을 두고 벽돌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박모씨는 요즘 현장의 안전 업무를 전담할 안전보건관리 담당자를 채용하기 위해 헤드헌팅 업체에 매일 전화하는 것이 주요 일과가 됐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내년 1월 말부터 전면 시행되면, 박씨 회사도 안전보건관리 담당자를 별도로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업장에서 사소한 안전사고가 발생해도, 대표이사인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해 회사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박씨는 “올해 우리 회사 영업이익이 3억원 정도 될 텐데, 당장 연봉 5000만원을 주고 안전보건관리 담당을 뽑아야 한다”며 “그마저도 지원자가 없어 골머리”라고 말했다.

50인 미만 중소기업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대다수 중소기업들이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법 적용이 유예되지 않으면, 중소기업 경영자들은 당장 범법자로 내몰릴 상황이라는 것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8월 회원사 892곳을 대상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준비가 어려운 점’을 설문한 결과, 전문 인력 부족(35.4%)과 예산(자금) 부족(27.4%)을 꼽은 업체가 60%를 넘었다.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직원 20~49명 규모 중소기업은 안전보건관리 담당자를 최소 1명 이상 둬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에서도 안전 관리자 수요가 큰 데다, 중대재해 발생 시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원을 꺼리는 이들이 많아 채용 공고를 내도 쉽게 채용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동일 업종들이 모인 협동조합에서 안전보건관리 담당자를 공동으로 선임할 수 있게 하는 등의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인건비·장비 가격 상승으로 안전 투자 비용도 급증하고 있다. 항타기(공사 현장에서 지반에 큰 구멍을 뚫는 장비) 6대를 운용하는 대구의 한 건설장비 업체 대표 이모씨는 최근 새로운 공사 현장에 들어갈 때마다 장비 안전 검사를 받는다. 중대재해법 이전에는 1년에 한번씩 안전 검사를 받으면 됐지만, 내년 1월부터는 의무적으로 새 현장에 장비를 투입할 때마다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씨는 “안전 비용만 1년에 한 대당 1500만원 정도가 더 들어간다”며 “회사를 폐업하는 것이 이득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제 혜택, 안전인력 채용 등 지원 필요

중소기업들은 중대재해법 적용에 앞서 각종 안전 투자를 위한 재정 및 세제 지원을 요구한다. 지난 8월 중소기업중앙회가 5인 이상 50인 미만 중소기업 892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중대재해법과 관련해 가장 필요한 정부 지원으로 ‘노후설비 개선 등 안전투자 재정 및 세제 지원’(45.0%)이 꼽혔다. 중대재해법 규정에 따라 안전에 투자한 중소기업에 대해 세제 혜택 등의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애초에 산업안전은 기업 상황이나 업종에 따라 필요한 수준이 다른데, 중대재해법은 이를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인 수의 안전 조치를 요구한다”며 “경제 침체가 더욱 심해질 것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중대재해 투자를 더 늘리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한 요구일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