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이어졌던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 호황을 맞은 국내 조선사들이 최근 해외 생산기지 구축을 재검토하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호황 때 인건비 절감을 위해 필리핀·중국 등에 대규모 조선소를 조성했다가 이후 불황으로 헐값 매각한 전례도 있지만, 당시 실패를 교훈 삼아 국내 숙련공을 꾸준히 파견해 생산 효율을 올린 베트남 합작 조선소 등 성공 사례도 있다. 4~5년 치 수주는 쌓였지만 고질적인 국내 인력난을 타개하고, 최근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군함 등 방산 분야에선 해외에도 생산 거점을 마련해 경쟁력도 키운다는 것이다.

그래픽=김성규

◇美 법인 신설, 사우디 합작조선소 시험 가동

한화오션은 올해 9월 이사회에서 미국 현지 자회사인 ‘한화오션 미국홀딩컴퍼니’ 설립안을 가결했다. 이어 한화오션은 최근 유상증자로 조달한 1조4971억원 중 약 4200억원을 글로벌 방산사업 확장을 위한 생산 거점과 함정 MRO(유지·보수) 기업 지분 확보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60조원에 달하는 캐나다 잠수함 사업 수주 등 해외 사업 확대를 위한 북미 생산 거점 확보 수순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시에 있는 ‘필리조선소’ 인수설도 나왔다.

HD한국조선해양의 자회사인 HD현대중공업이 아람코 등 사우디아라비아 국영회사와 합작한 사우디 현지 조선소 IMI도 이달부터 시험 가동에 들어갔다. 대형 독 3개, 골리앗 크레인 4기, 안벽 7개 등을 갖추고, 연간 40척 이상 건조할 수 있는 IMI 조선소는 내년 하반기 본격 가동에 들어가고, 조선소 지분 20%를 보유한 HD현대중공업은 인근에 추가로 선박엔진 공장도 조성하고 있다.

그래픽=김성규

◇국내 인력난, 납기 지연 우려에 해외 생산 검토

국내 조선사의 해외 생산 거점 검토는 근본적으로 인력난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국내 조선소 독이 몇 년은 꽉 차는데 정작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등 호황기와 인력난이 겹쳐 선박 납기 지연 위험이 커지자 다시 해외 진출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늘어난 수주 물량에 대응하기 위해 2027년까지 약 4만3000명 인력 충원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한국 조선소의 가장 우월한 경쟁력은 제조 역량과 칼 같은 납기 준수였는데, 고질적인 인력난으로 중소 조선사는 물론 대형 조선사들도 일정 차질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HD현대중공업은 필리핀 수비크조선소 시설을 임차해 앞서 필리핀에 수출한 군함 수리 조선소를 운영한다는 계획인데, 유지보수 사업 진출이지만 향후 신조선 사업 확장, 나아가 수비크조선소 인수설까지 거론된다. 다만, 과거 대우조선해양의 중국 산둥조선소, STX조선해양의 중국 다롄조선소, 한진중공업의 필리핀 수비크조선소 등 수천억~수조원대 해외 투자 실패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2000년 초반 호황을 맞아 국내 조선사는 현지 저렴한 노동력으로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 해외 조선소에 대규모 투자를 했지만, 생산성은 국내 조선소 대비 절반 수준에 그쳤다. 숙련공이 극도로 부족한 영향이었다.

◇베트남 합작 성공 사례…현지 기술자 교육 강화

중국·필리핀 조선소 실패 사례와 달리 HD현대의 계열사 현대베트남조선은 성공 사례로 꼽힌다. 1996년 현대미포조선과 베트남 국영 합작회사로 설립한 현대베트남조선은 수리·개조 사업을 하다가 2000년대 후반 신조선사업으로 전환했다. 다른 해외 조선소들이 생산성 저하로 폐업 수순에 이를 때, 현대미포조선에서 파견된 엔지니어 60여 명이 상주하면서 생산 공정 전반에 국내와 동일한 품질관리 체계를 적용했다. 이후 베트남은 조선업 세계 5위 국가로 성장했고, 현대베트남조선이 이 가운데 약 74%를 차지하고 있다. 사업 호조에 작년 700t 골리앗 크레인을 신설했고, 올해 매출 목표는 약 5억4380만달러(약 7000억원)다.

필리핀 수비크조선소에서 군함 유지·보수 사업을 검토하는 HD현대중공업은 필리핀 기술자 60여 명을 울산에 데려와 함께 일하며 기술 노하우를 공유한다. 일부는 이미 투입됐고, 연말까지 인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해외 생산시설이 국내와 비슷한 수준의 기술력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우디 합작 조선소 IMI에도 올해 연말 HD현대중공업 엔지니어 100여 명이 파견될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