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 패널 핵심 소재인 POE(폴리올레핀 엘라스토머)의 모습. 전 세계에서 이를 개발·양산할 수 있는 기업은 LG화학을 비롯해 미국 다우케미칼과 엑손모빌, 일본 미쓰이, 사우디 사빅과 합작한 국내 SK지오센트릭 등 정도에 불과하다. 자료=LG화학

지난 10월 6일 울산 남구의 화학 업체 유니드 공장. 배용상 부공장장이 설비의 덮개를 열자, 흰색 가루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기계 안에서 떨어져 내렸다. 고순도 염화칼륨과 소금물을 전해조(電解槽)에 투입해 화학반응을 일으킨 다음, 300℃로 가열해 생산한 고체 가성 칼륨이었다.

‘산업의 소금’이라 불리는 가성 칼륨은 태양광, 반도체, 수소 등 첨단 산업부터 농약, 의약품, 식품첨가물까지 필수적으로 쓰이는 소재로 꼽힌다. 유니드는 해마다 한국과 중국을 합쳐 전 세계 가성 칼륨 수요의 3분의 1을 생산, 미국 옥시켐과 올린, 벨기에 이노빈 등을 제치고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유니드의 가성 칼륨이 없으면 최첨단 산업부터 농업·제약 산업까지 타격을 입고, 심지어 스포츠 음료 생산에도 영향을 준다. 유니드 울산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 칼륨 공장으로 언론에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산업의 근간 소부장, 새로운 엔진으로 부각

소재·부품·장비, 이른바 ‘급소 기술’이라 불리는 소부장은 짧은 시간에 압축 성장을 하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반도체·조선·철강·디스플레이 등 주요 제조업과 달리 우리 산업계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분야로 꼽혀왔다.

하지만 가성 칼륨과 같이 세계시장을 장악한 소부장이 하나둘씩 등장했고, 첨단 산업에서도 글로벌 경쟁을 이겨내는 기업들이 속속 나타난다. 전 세계 자동차 타이어의 절반 이상에 들어가는 타이어 코드를 비롯해 ‘섬유의 반도체’라 불리는 스판덱스는 물론 각종 반도체용 제조·검사 장비와 디스플레이용 필름 등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울산 KPX케미칼 공장에서 한 직원이 반도체 웨이퍼의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주는 CMP (Chemical-mechanical polishing)패드를 살펴보는 모습. /KPX케미칼

기술력이 국제 질서를 만들고, 국제 패권을 결정하는 이른바 기정학(技政學·tech politics)의 시대에 기술력의 핵심인 소부장이 우리 산업의 뉴엔진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차전지 산업의 밑바탕에 LG화학, 포스코퓨처엠 같은 소재 업체가 있고, 수출 효자 자동차의 배경에 품질 높은 자동차 부품이 있는 것처럼 결국 소재→부품→완제품으로 이어지는 제조업 가치 사슬에서 소재·부품 기술력이 궁극적으로 국가 제조업, ‘메이드 인 코리아’의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탄소섬유·POE 등 소부장 씨앗 성장

지난 10월 6일 전북 전주시 덕진구의 효성첨단소재 공장. 700m에 이르는 라인 끝에 있는 와인딩 공정에 들어서니 하나당 실 2만4000개씩 묶인 탄소섬유 400~500가닥이 머리 위로 옮겨지며 실패에 감기고 있었다. 탄소섬유는 무게는 철의 4분의 1 수준이지만, 강도는 철의 10배, 탄성은 철의 7배에 이르는 소재다. 최송주 CTO(최고 기술 책임자)는 “단면적 1㎟인 탄소섬유는 700㎏ 정도인 경차를 매달아도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특성 덕에 탄소섬유는 2010년대 중반 이후 항공기, 차량은 물론 수소와 CNG(압축천연가스) 탱크, 건축 등으로 용도가 확대되며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다. 일본 업체가 장악한 세계시장에서 효성은 2013년 연산 2000t 양산에 성공한 뒤 해마다 증설에 나서고 있다. 최송주 CTO는 “2028년까지 전주 공장 기준 연산 2만4000t까지 늘리며 전 세계 시장의 10%를 차지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미래가 유망한 소부장은 탄소섬유만이 아니다. 태양광 패널 핵심 소재인 POE(폴리올레핀 엘라스토머)는 전 세계적으로 LG화학을 비롯해 미국 다우케미칼과 엑손모빌, 일본 미쓰이, 사우디 사빅과 SK지오센트릭 등만 개발·양산에 성공한 최첨단 소재다.

그래픽=송윤혜

◇韓 소부장, 한계보다 기회 말할 때

국내 소부장 업계는 과거엔 한계가 먼저 부각됐지만, 이제는 한계보다는 기회를 얘기할 때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소부장 분야 사업체 수와 종업원 수는 전체 제조업에서 절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부가가치 비율은 57.1%로 절반 이상이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수출 통제가 논란이 된 2010년대 말 이후 몇 년 사이에 소부장 생태계가 빠르게 자리 잡으면서 이제는 소부장을 기회로 접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2001년 부품소재발전기본계획으로 첫 닻을 올린 국내 소부장 정책은 이후 소부장 경쟁력 강화 대책으로 발전한 뒤, 현 정부 들어 글로벌화 전략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본부장은 “소부장이 바탕이 돼야 패스트 팔로어를 벗어나 세계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며 “소비자의 선택을 받도록 하는 마지막 1%를 결정하는 소재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부장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