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0일, 인천시 서구의 유리 용기 제조사 동신관유리공업 공장. 서정섭(86) 회장이 수직으로 꽂혀 있는 1.5m 길이 원통형 유리가 일정 간격으로 절단되는 공정을 살피고 있었다. 내부 온도가 40도에 육박하는 이 공장에서는 의약품 유리 용기 ‘바이알’이 연간 2억4000만개씩 생산된다. 용량 2ml부터 200ml까지 고객사 주문에 맞게 제조된 바이알들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 국내 대표 제약사들로 보내진다. 올해로 창립 만 54년을 맞은 동신관유리공업은 국내 바이알 생산량의 35%를 차지하는 이 업계 1위 기업(지난해 매출액 274억원)이다.
“사장도 기술자가 돼야 한다”. 빨갛게 달궈진 유리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 모양을 잡았던 1960년대 한국에서 유리 용기 사업에 뛰어든 서정섭 회장이 지켜온 철학이다. 경희대 법학과 졸업 후 제약 회사를 다니던 서 회장은 약품 대량생산을 위해 일정한 규격의 유리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뒤, 1969년 전 재산을 털어 구입한 일본산 앰풀 제조기를 기반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전문 노하우가 없던 탓에 불량품을 만들어내기 일쑤였다. 사업 초기에는 직원 3명의 월급마저 주기 어려웠다. 서 회장은 “2년 동안 실패를 거듭해 규격 앰풀을 만들어냈다”며 “당시 유한양행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약품 제조기가 있었는데, 이 안에 우리가 만든 앰풀을 넣고 가동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국내 약품 생산 자동화의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동신관유리공업은 1987년 국내 최초로 원 포인트 컷 앰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 전만 해도 유리로 밀봉된 앰풀을 열기 위해선 한쪽을 가위나 칼로 잘라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리 가루가 앰풀 속에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원 포인트 컷 앰풀은 용기에 작은 틈을 만들어 손으로도 쉽게 부러뜨릴 수 있게 해 가루 발생을 크게 줄였다. 당시 서 회장은 일본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기술을 배웠고, 그 결과 한국을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원 포인트 컷 앰풀 제조국으로 만들었다. 서 회장은 “원 포인트 컷 앰풀이 유럽 의학 잡지에 막 소개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국내에서 이를 납품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후 백신, 항암제를 담는 바이알까지 만들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 미국 등 해외로 바이알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서 회장은 1998년 해외 사업이 커지자 아들인 서한석(54) 대표를 회사로 불러들였다. 서 대표가 한국외대에서 일본어와 경영학을 전공한 데다, 당시 선경물산(현 SK상사)에서 해외 영업을 담당해 회사의 글로벌 진출을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 대표 합류 후 동신관유리공업은 베트남에 현지 법인과 공장을 세우는 등 해외 사업을 계속 키워나갔다. 지난해 수출액은 290만달러(약 38억원)로 전체 매출의 약 14%다.
서 대표는 “동신관유리공업이 54년간 유리 용기 제조에 전념하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기술 투자를 1순위로 뒀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불순물을 최소화할 수 있는 ‘코팅 바이알’을 출시하는 등 기술 혁신을 이어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