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미국 내 중국산 저가 범용 반도체 수급 현황을 조사해 관세 부과를 검토하기로 했다. 첨단 반도체 중심이었던 대(對)중국 반도체 규제를 범용 반도체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중국은 희토류 추출과 분리 과정 등에 쓰이는 기술의 수출을 금지하기로 했다. 전 세계 시장의 90%를 틀어쥐고 있는 희토류 기술을 미국 제재에 대응하는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전략이다. 반도체와 희토류 등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는 모양새이다.
미 상무부는 21일(현지 시각) 내년 1월부터 산업안보국(BIS) 주관으로 자동차, 항공우주, 방산, 통신 등 주요 산업 분야 미국 내 기업을 대상으로 범용 반도체의 사용 현황 및 조달처 등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형 또는 레거시 반도체(legacy chips)로 불리는 범용 반도체는 자동차, 항공기 등 주요 산업에 두루 쓰인다.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생산하는 반도체 수준의 첨단 기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갈수록 중국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미 상무부는 조사의 목적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강화, 저가 범용 반도체 생산의 공정 경쟁 촉진, 중국에 의한 미국 안보 위험 축소 등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중국은 희토류 기술의 수출을 공식 금지했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중국 중심의 희토류 공급망 재편을 위해 기술 개발에 나서자 이를 막겠다는 것이다. 조상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반도체 산업 육성에 시간과 자금이 필요한 중국을 상대로 미국이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미·중 양국이 서로 아픈 곳을 노리며 점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21일 성명에서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중국이 자국 기업의 범용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고 미국 기업이 경쟁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면서 우려스러운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징후를 봐왔다”며 이번 조사가 “우리의 다음 행동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동차, 항공·우주, 방산 등 100개 이상의 기업을 대상으로 중국산 범용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 등을 파악하는 내년 초 조사가 제재를 위한 조치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미, 중국산 범용 반도체까지 잡는다
미국이 새롭게 겨냥한 범용 반도체는 통상 회로 선폭이 28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 이상인 반도체를 말한다. 2011년 양산이 시작된 기술로, 현재 삼성전자·TSMC 등 주요 반도체 업체들의 공정보다는 크게 뒤떨어져 있지만 고급 연산이 필요 없는 자동차와 가전, 무기 등에 다양하게 사용된다. 가격이 저렴해 시장 규모는 첨단 반도체보다 작지만, 수량 기준으로는 전 세계 반도체 수요의 75% 이상을 차지한다. 미국의 첨단 반도체 규제로 반도체 산업 육성이 어려워진 중국은 규제 대상이 아닌 범용 반도체 산업 육성에 큰 공을 들여왔다. 중국 정부가 2020년부터 범용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짓는 자국 기업에 최대 10년까지 법인세 면제 혜택을 주자 업체들은 투자에 나섰다. 중국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기업 SMIC는 지난해 상하이 28나노 칩 공장 건설에 89억달러(약 11조원)를 투자했고, 윈텍테크놀로지도 연간 웨이퍼 40만장 생산 규모의 자동차용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8나노 이상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비중은 올해 29%에서 2027년 33%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미국은 중국산 범용 반도체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자국과 서방 반도체 업체들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이 저가에 범용 반도체를 공급하고 시장점유율을 높이면 기존 업체들이 퇴출되고, 결국 중국 중심의 범용 반도체 공급망이 전 세계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일부 중국 반도체 회사들이 저가 물량 공세로 경쟁사를 끌어내리고 있다”며 “미국 정부는 범용 반도체에서도 중국 기업의 미국 공급망 장악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중국이 이미 범용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는 만큼, 첨단 반도체와 같은 수출 통제보다 중국산 범용 반도체에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는 것 같은 조치가 유력한 것으로 본다.
이 같은 조치가 현실화하면 최대 수혜는 범용 반도체 세계 1위인 대만이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첨단 반도체에 집중하는 국내 반도체 업계나 미국·유럽산 차량용 반도체를 쓰는 국내 자동차 업계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희토류 기술 수출 통제로 반격
중국은 자국이 사실상 세계 시장을 독점하는 희토류 가공 기술에 대한 수출 금지 조치로 대응했다. 중국은 세계 희토류 가공 및 정제 산업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희토류 가공·정제는 인체에 치명적인 황산을 사용하는 대표적 오염 산업이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서는 이 때문에 희토류 정제를 대부분 중국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최근 미국과 일본, 호주 등이 희토류 가공·정제 기술을 개발하며 중국 공급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국이 이를 원천 봉쇄하려는 것이다. 중국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로 미국에 반격을 가한 셈이다. 앞서 중국은 미국이 첨단 반도체 기술을 막자 반도체와 이차전지 등의 제조에 중요하게 쓰이는 갈륨과 게르마늄, 흑연 등의 수출을 통제하는 등 자원을 무기로 활용해왔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이 내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미·중 갈등 상황은 갈수록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미국의 압박이 커질수록 중국은 빈틈을 찾으면서 자립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범용 반도체·희토류
범용 반도체: 구형 혹은 레거시 반도체로 불리며 통상 2011년 양산을 시작한 28나노미터 공정과 그 이전 공정에서 만들어진 반도체를 일컫는다. 주로 전력 공급 장치에 활용되며 차량을 제어하는 부품과 5G(5세대 이동통신) 장비 등에 쓰인다.
희토류(稀土類): 영구자석을 만드는 데 쓰이는 테르븀·디스프로슘, 풍력발전 터빈을 만드는 네오디뮴, 충전식 배터리에 들어가는 란타늄 등을 말한다. 매장량이 드물어 희토류라고 불린다. 원자 번호가 높고 무거우며 비싼 중(重)희토류는 중국이 100% 장악하고 있으며, 경(輕)희토류도 세계시장의 85%가량이 중국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