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주식시장에 공시를 통해 밝힌 OCI그룹과 한미그룹의 ‘그룹 간 통합’은 국내 산업계에서 이례적인 경우다. OCI그룹의 지주사인 OCI홀딩스는 한미그룹의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의 최대 주주가 되고, 한미사이언스 측 주요 주주들은 OCI그룹 지주사의 1대 주주가 된다. 이번 협상을 주도한 이우현 OCI 회장과 임주현 한미약품 사장이 작년 11월 이후 수차례 만나며 신뢰를 쌓아 이 같은 합병안을 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한미그룹의 경우 이번 통합을 추진한 임주현 사장 측에 대해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주의 장남 측이 “배제됐다”면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그래픽=송윤혜

◇태양광에 이어 제약·바이오까지 노리는 OCI

태양광 업체로 잘 알려진 OCI는 최근 신성장 동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2018년 제약·바이오 사업에 뛰어든 뒤 2022년 부광약품의 1대 주주에 오르며 제약·바이오 부분을 키워갔지만 성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약·바이오 분야 연구·개발 능력이 축적돼 있는 한미약품이 매력적이었다.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은 “영업 현금 흐름이 탄탄해 자금력이 있는 OCI 측과 기술력이 있는 한미의 통합을 통해 제약·바이오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OCI는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한미는 OCI 기반을 토대로 미국과 말레이시아 등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OCI홀딩스는 창업자 이회림 명예회장이 1959년 설립한 동양화학을 모태로 한 국내 대표 화학 기업이다. 과거 비료 원료인 인산칼슘, 공업용 과산화수소 등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화학 업체에서, 2대 이수영 회장 시절인 2000년대 태양광용 폴리실리콘 사업에 뛰어들며 체질 개선에 성공했다. 2022년 7559억원, 지난해 3분기까지 4661억원 영업이익을 냈다.

◇남매 간 분쟁으로 가나? 모녀가 주도한 합병

한미그룹에서는 OCI그룹과의 통합을 송영숙 한미그룹회장과 딸 임주현 사장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결정으로 임주현 사장이 사실상 그룹 후계자로 낙점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반면 장남 임종윤 한미약품 사장은 이번 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다고 주장하며 통합 반대 입장을 강하게 밝혀 경영권 분쟁이 현실화될 전망이다.

2020년 창업주 임성기 회장 별세 당시만 해도 한미약품 유력 후계자는 장남인 임종윤 당시 한미사이언스 대표였다. 그는 2000년대 중반 북경한미약품 부사장, 사장 등을 지내며 성과를 냈고 2009년 한미약품 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임 창업주 별세 후 임 대표의 어머니인 송영숙 회장이 그룹을 이끌면서 후계 구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송 회장은 임종윤 사장이 이끌던 한미사이언스에 2020년 각자 대표 체제로 경영에 참여했고, 2년 후에는 한미사이언스 단독 대표가 됐다. 2022년 임종윤 사장은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에서 물러나고, 이어 사내이사 명단에도 들지 못해 후계 구도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둘째인 임주현 한미약품 사장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그룹에선 임주현 사장이 창업주 생전부터 경영 수업을 받으며 준비했다고 하지만, 장남 임종윤 사장 측은 “우리가 실권하면서 임주현 사장이 부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임종윤 사장은 중국 사업 경험을 토대로 2009년 홍콩에 바이오뱅크 관련 회사인 코리컴퍼니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임종윤 사장은 현재 한미약품 사장 직함을 갖고 있지만, 경영에는 거의 권한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남 임종윤 사장, 법적 대응 나설 듯

OCI홀딩스는 송 회장과 임주현 사장의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확보해 최대 주주에 오르고, 송 회장 모녀는 통합 지주사 지분 10%가량을 보유하게 된다. 통합 지주사 이사회는 OCI 측과 한미 측이 2명씩 사내이사 4명과 사외이사 5명으로 구성될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윤 사장의 반발은 변수다. 임종윤 사장은 지난 13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어떠한 형태로도 이번 통합과 관련해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미그룹 측은 “이번 통합의 취지와 방향성에 대해 설명하고 통합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OCI 이우현 회장은 “양측의 지난해 거래 규모가 4000만원 정도로 거의 없어 기업 결합 심사가 큰 문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특수관계인을 제외하면 개인 최대 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의 역할도 주목받고 있다. 신 회장은 임성기 창업 회장의 고교 후배로, 한미사이언스 지분 12.15%를 갖고 있다. 신 회장이 임종윤 사장을 지지한다면 경영권 분쟁이 복잡해질 수 있다. 다만 신 회장은 경영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남 임종훈 사장도 아직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