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철원

지난해 상반기(1~6월) 국내 100대 기업이 개최한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이 던진 반대표는 전체 투표수의 0.4%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사외이사들의 반대가 반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기업은 100곳 중 91곳에 달했다. 최근 포스코홀딩스의 호화판 이사회로 논란이 커진 상황에서 견제와 감시라는 목적 아래 도입된 사외이사 제도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23일 본지가 기업 데이터 연구소 CEO스코어와 공동으로 지난해 상반기 기준 국내 시가총액 100대 기업 이사회를 분석한 결과, 총 투표수 8906표 중 사외이사가 행사한 반대표는 38표, 전체의 0.4%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집계 결과 반년 동안 반대표가 한 표라도 나온 곳은 SK㈜, 네이버 등 9곳뿐으로 91곳에서는 단 하나의 반대표도 나오지 않았다. 38표 중 절반이 넘는 22표의 반대표가 나온 SK㈜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100대 기업에서 이사회에 올라온 거의 모든 안건이 무사통과된 것이다.

한전의 한전공대 설립, 강원랜드의 오투리조트 지원 등은 거수기 이사회의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전 이사회는 2019년 8월 ‘한전공대 설립 및 법인 출연안’을 심의 의결하며 한국에너지공과대(한전공대) 설립에 닻을 올리는 역할을 했다. 지난 정부에서 탈원전과 전기 요금 인상 지연 탓에 재무 구조가 부실화된 한전에 부담이 크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나왔지만, 당시 사외이사 8명 가운데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를 제외한 7명 전원이 찬성에 손을 들었고, 한전공대는 2022년 3월 허허벌판에서 개교했다.

지난해 3월 열린 SK㈜ 이사회 당시 부회장들에 대한 스톡옵션 부여 안건 4건은 사외이사 5명 전원이 반대표를 던지며 부결됐다. 이 밖에 작년 상반기 사외이사들의 반대로 이사회에서 제동이 걸린 안건은 IBK기업은행의 기부금 출연 안건과 바이오 업체 알테오젠의 주주 제안 채택, KT의 이사회 내 위원회 구성 등 총 4건에 불과하다.

◇사전 설명회…이사회 유명무실화 부추겨

일각에선 국내 기업들이 이사회에 안건을 올리기 전에 사외이사에게 설명하는 ‘사전 설명회’를 가지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반대표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형식이 사외이사들의 의견을 미리 한쪽으로 모으는 왜곡을 가져오고,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이사회의 유명무실화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경준 CEO스코어 대표는 “주총에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지기는 어려운 현실에서 이사회가 경영진의 주요 의사 결정에 대한 견제와 감시 역할을 해야 한다”며 “사전 설명회는 이사회의 자유로운 토론과 결정을 막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사외이사들이 단순히 거수기 노릇을 하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는 지난해 초 주총 시즌을 앞두고 신한·하나·우리금융 지주의 사외이사 연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라고 권고할 정도다. 2017년 DLF(파생 결합 펀드) 사태, 2019년 라임 펀드 사태, 2020년 옵티머스 사태 등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경영진에게 기존 사외이사들이 ‘집단적 무대응’으로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것을 두고 유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법·학·관’이 3분의 2… 다양성 보완 필요

CEO스코어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6월 말 기준 사외이사 457명 중 교수 등 학계 인사는 191명으로 40%를 웃돈다. 전직 관료와 판검사 등 법조계 출신까지 더한 이른바 ‘법·학·관’은 3분의 2를 넘어선다.

나이도 60대가 절반 이상이고, 70대도 10%를 웃돈다. 100대 기업에서 30대 사외이사는 1990년생인 박새롬 UNIST 교수(카카오) 한 명뿐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특정 직업 출신이 사외이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다양성을 해친다”며 “경영진인 사내이사들과 다른 시각에서 사안을 살피고 결정할 수 있도록 사외이사 출신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