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세계 8위 해운사 HMM(옛 현대상선)의 매각 협상이 7일 새벽 최종 결렬됐다. 작년 7월 20일 매각 공고를 시작으로 약 7개월간 이어진 매각 절차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정부가 투입한 수조원대 공적 자금 회수도 늦어지게 됐다. 팬데믹으로 공급망 붕괴 특수를 누렸던 해운 업황이 고꾸라진 데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보유한 영구채도 최종 인수 마무리 단계에서 난관이 됐다. 채권단은 매각 대상 주식 외에 약 1조6800억원 규모 영구채(만기 없이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를 보유 중인데, 이를 전환하면 인수 측과 지분 격차가 6.1%포인트밖에 나지 않는다. 인수자 측 입장에선 인수 후에도 경영권 간섭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해운 업계에선 한국 1위 국적 선사인 HMM의 매각과 가치에 맞는 제 값을 받는 건 점점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팬데믹 특수가 끝나면서 해운 운임은 급락했고, 홍해발(發) 전쟁 리스크는 세계 해운사에 운항 지연과 비용 증가를 가져왔다. HMM이 소속된 해운동맹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세계 5위 독일 하파크 로이트가 내년 2월 탈퇴해 세계 2위 덴마크 머스크와 새로운 해운동맹을 창설한 것도 우호적 환경은 아니다.
◇K해운 경쟁력인 HMM 매각 안갯속
해운은 대외무역 의존도(GDP 중 수출입 비율)가 약 84%에 달하는 한국 경제의 핵심이다. 수출입 물량 중 소형·고부가가치 상품을 담당하는 항공운송을 제외하면 99.7%가 해상운송에 의존한다. 세계 8위인 HMM을 비롯해 덴마크·스위스·중국·일본·대만의 주요 국적 선사 10곳이 세계 해운 물동량의 80%대를 장악하고 있다.
2016년 유동성 위기로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HMM은 팬데믹 특수로 2020년 9년 만에 적자에서 탈출했고, 2022년에는 영업이익 9조9455억원으로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에 매각 적기로 판단한 채권단이 매물로 내놨지만, 협상은 막판에 틀어졌다. 업계에선 “채권단 경영이 지속되면 한국 해운업의 미래 경쟁력을 위한 투자에 소홀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팬데믹으로 해운 운임이 폭등했을 때, 글로벌 해운사들은 인수·합병(M&A) 경쟁을 치열하게 펼쳤다. 세계 1위 MSC와 2위 머스크는 경쟁적으로 세계 항만 인프라에 투자해 거점을 강화했고, 주요 선사들도 당시 매물로 나온 중소 물류 기업들을 인수하며 몸집을 키웠다. HMM도 신규 선박 발주를 확대했지만, 선사 순위 지표인 컨테이너선 선복량(적재량)은 2월 기준으로 점유율 2.7%(약 78만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에 그친다. 7위 대만 에버그린(5.7%·약 164만TEU)의 절반도 안 된다.
HMM 경쟁력은 제자리인데, 경쟁 환경은 나빠졌다. 홍해 항로가 막히면서 주요 항로에서 선박이 제때 도착하는 비율은 50%대로 하락했고, 운항 기간은 길어지면서 보험료 등 비용은 늘었다. 여기에 머스크·하파크 로이트발(發) 해운동맹 재편 과정에 운임이 조정되면서 ‘출혈경쟁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종길 성결대 글로벌물류학부 교수는 “HMM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선사들도 부산항에 오고, 연쇄적으로 화물 운임의 경쟁력, 한국 화주의 서비스 효율성도 제고된다”고 했다.
◇매각 막판 걸림돌은 ‘실질적 경영권’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HMM 매각 협상 결렬은 최대 주주인 정부 채권단(KDB산업은행·한국해양진흥공사, 약 57.9%)의 경영권 참여 요구가 결정적이었다. 산은과 해진공은 ‘국적 해운사’인 HMM의 중요성을 감안해 매각 후에도 중요 경영 사항은 사전 협의나 동의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권단이 인수 측인 하림과 사모펀드 컨소시엄이 약 10조원에 달하는 HMM의 사내 유보금을 어떻게 활용할지, 장기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를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의 쟁점이 된 잔여 영구채 주식 전환 유예 문제는 하림이 산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산은과 해진공이 보유한 1조6800억원어치의 영구채가 주식으로 전환되지 않을 경우 하림은 지분율 57.9%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2025년까지 잔여 영구채가 전량 주식으로 전환되면 하림의 지분율은 38.9%로 떨어지고, 3년간 최대 2850억원의 배당금도 받지 못하게 된다. 하림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였는데도 매각 측이 경영권 개입 카드까지 꺼내자 결국 손을 놓았다는 게 업계 평가다. HMM을 가급적 빨리 정리하고 싶은 산은과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마련하고 싶은 해진공의 입장 차도 협상에 걸림돌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HMM이 보유한 현금이 인수 자금의 원리금 상환에 쓰이는 게 아니라 해운업에 재투자될 수 있도록 여러 안전 장치를 마련하려 했는데, 협상이 잘 안 됐다”고 했다. 현재 산은과 해진공이 보유한 영구채가 내년까지 모두 주식으로 전환되면 매각 규모가 더 커지기 때문에 팔기는 더 어려워지게 된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10대 그룹이 아니면 인수가 어려워 보인다”며 “재매각은 상당 기간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