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백형선

‘가전의 영원한 맞수’ 삼성과 LG가 프리미엄 TV 생산을 위해 손을 잡았다. 삼성전자가 만드는 프리미엄 TV 화면에 LG가 만드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를 넣기로 한 것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부터 5년간 LG디스플레이의 ‘화이트 OLED’ 패널 수백만대를 공급받기로 하는 계약을 최근 체결했다.

1958년 금성사를 설립해 가전 사업을 해온 LG와, 10여년 뒤인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해 가전 사업에 뛰어든 삼성은 50여 년간 치열한 경쟁 관계였다. 세계 시장에서도 TV 판매 세계 1등, 2등을 삼성과 LG가 하고 있어 영원한 라이벌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가 있는데도, LG디스플레이 제품을 씀으로써 시너지를 내려는 것이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양사의 협력에는 이재용 회장과 구광모 회장의 결단이 있었다”며 “삼성과 LG가 중국의 저가 TV 공세에 맞서 프리미엄 TV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계약은 가전업계에서 삼성과 LG의 ‘TV 동맹’으로 불리고 있다. 그동안 프리미엄 TV 패널로 ‘QLED(퀀텀닷발광다이오드)’를 주력으로 밀어왔던 삼성전자는 LG의 OLED TV를 견제해 왔다. 시장의 OLED TV 수요가 견고하자 삼성도 뒤늦게 OLED TV 판매에 뛰어들었지만, 삼성디스플레이 물량이 부족해 판매량이 크진 않았다. 이런 가운데 중국이 LCD(액정표시장치) TV 공세로 ‘TV 판매 세계 1위’라는 삼성의 자리를 위협하자, 최근 이재용 회장이 OLED TV 비중을 본격 확대하는 방향으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딜’을 위해 LG전자는 지난해 자사 OLED 노트북에 삼성디스플레이의 OLED를 탑재하는 계약을 맺는 등 ‘주고받는’ 거래를 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재용 회장과 구광모 회장의 주도로 향후 삼성과 LG는 반도체와 화학·소재 분야에서도 협업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4대 그룹을 중심으로 3·4세 오너 경영이 확립되고 글로벌 경쟁이 중요해지면서, 친분이 두터운 회장들이 발전적 협력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백형선

◇삼성·LG, 삼성·현대차… 과거의 라이벌들이 뭉친다

1995년 삼성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면서 수십년 앙숙 관계였던 삼성과 현대차도 최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2021년 제네시스 G80 전기차에 삼성전자 자회사 하만의 오디오 시스템을 처음 탑재한 데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삼성SDI의 배터리를 2026년부터 차세대 유럽향 전기차에 탑재하는 계약을 맺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는 과거 사무실 집기조차 삼성 것은 안 쓴다고 할 만큼 견제 의식이 컸고, 전기차에 LG와 SK 배터리만 써왔다”며 “이번에 삼성 배터리를 쓰기로 한 것은 정의선 회장의 강한 협력 의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시스템 ‘엑시노스 오토 V920′을 2025년부터 탑재하기로 지난해 결정하기도 했다.

현대차는 SK·LG와의 협업도 강화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는 지난해 인도네시아와 미국에 배터리 합작 공장을 짓기로 했고, 2024년형 GV80에 LG전자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다. 또 SK온과도 미국에 배터리 합작 공장을 짓고 있으며, 수소 생산·유통 사업을 하는 SK E&S와 수소버스 보급 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

◇회장들, 자주 만나면서 친해지고 ‘코리아 원팀’ 인식 강해져

과거 경쟁의식이 팽배하던 4대 그룹이 손을 맞잡게 된 것은 글로벌 경쟁을 위해 협력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우리 기업들은 국내 경쟁을 통해 서로 성장했지만, 지금은 글로벌 무대에서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미국 IRA나 유럽의 탄소세 같은 보호무역주의, 국가 간의 경쟁 구도가 강화되는 지금은 우리끼리 싸우기보다는 한팀으로 뭉쳐야 한다는 인식이 더 강하다”고 말했다.

최근 4대 그룹 회장들의 만남이 부쩍 잦아지면서 친분이 두터워진 것도 이들이 실질적인 협력 성과를 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평가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2016년 전경련(현 한경협)이 무력화되면서 재계 회장들이 만날 기회가 적어졌지만, 지난해 대통령 해외 순방과 엑스포 유치전에 동참하면서 만남이 잦아졌고, 이 과정에서 여러 협력 아이디어도 오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이재용·최태원·정의선·구광모 회장은 분기별 한 번꼴로 모임을 갖고 있다”며 “돌아가면서 호스트를 맡아 장소를 정하고, 다른 기업 회장들도 이따금 참여하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 사업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하면서 실질적인 협력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