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불리는 국내 증시의 저평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기업 밸류업(가치 상승)’ 정책을 이달 내 발표하기로 한 가운데, 주가 부양 분위기에 올라탄 행동주의 펀드들이 다수 기업들에 강력한 주주환원을 요구하며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행동주의 펀드들이 자사주 소각, 배당 확대 등 강력한 주주환원책을 요구하자, 기업들은 단기적인 주가 부양보다는 장기 성장 경쟁력을 위한 투자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며 맞서고 있다.

삼성물산은 15일 주주총회 소집 공고를 내고 “다음 달 15일 주총에서 영국계 자산운용사 시티 오브 런던 등 5개 사의 주주 제안을 안건으로 상정한다”고 밝혔다. 지분 1.46%를 확보한 시티 오브 런던 등 5개 사가 이달 초 삼성물산에 “주당 배당액을 2550원이 아니라 4500원으로 늘리고, 내년까지 자사주를 5000억원어치 매입하라”고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이들은 “삼성물산의 저조한 주가가 장기화돼 왔고, 배당 여력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삼성물산은 그동안 이들과 7번의 면담을 진행했으나 설득에 실패하자 ‘표 대결’에 부쳐 주주 전체의 판단을 받기로 했다. 삼성물산은 이날 공고에서 “주주제안이 요구하는 배당과 자사주 매입액은 총 1조2364억원으로, 이는 삼성물산 잉여 현금 흐름을 100% 초과한다”며 “이 같은 현금 유출이 이뤄지면, 미래 경쟁력을 위한 투자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고 주주들에게 호소했다.

삼성물산뿐 아니다. KT&G·삼양그룹·현대엘리베이터·7대 금융지주 등은 국내에서 성장한 행동주의 펀드들로부터 “주주 환원을 늘리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그동안 주가 저평가 원인으로 지목된 소극적인 배당 정책과 불투명한 지배구조 등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기업의 장기 성장 경쟁력까지 훼손하면서까지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성 행동주의 펀드들의 저의는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 초 삼성물산을 향해 주주제안에 나선 펀드들은 시티 오브 런던, 안다자산운용,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스 등 5개 사로 모두 합쳐 1.46%의 지분을 갖고 있다. 다수 펀드들이 적은 지분으로 주주제안의 최소 요건인 1% 이상을 확보한 것으로, 늑대들이 무리 지어 공격하는 ‘울프팩(wolf pack, 늑대 무리) 전략’을 활용했다.

삼성물산은 올 초 보통주 주당 2550원의 배당을 하기로 결정했다. 전년 대비 10.9% 증가한 금액으로 잉여 현금 흐름의 49%에 해당한다. 또 지난해 발표한 ‘자사주 전량 소각’ 방침을 이행하기 위해, 올해부터 3년간 매년 3분의 1(780만주)씩, 자사주를 소각한다고 15일 밝혔다. 보유하고 있는 우선주 16만주는 올해 전량 소각하기로 했다. 자사주 소각 금액만 총 1조원 이상이다. 그런데 행동주의 펀드들은 추가 배당 여력이 있으니 주당 배당액을 4500원으로 늘리고, 자사주를 5000억원어치 추가로 매입해 주가 부양에 나서라고 요구한 것이다. 삼성물산이 주주들에게 “미래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해 반대해 달라”며 읍소한 이유다.

그래픽=박상훈

◇배당성향 98%인데도 추가 환원 요구

행동주의 펀드들이 목표로 삼은 기업은 삼성물산뿐 아니다. 최근 국내에서 성장한 행동주의 펀드들도, 그동안 글로벌 펀드들의 타깃에서 벗어나 있던 기업들을 상대로 주가 부양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영국에 소재한 글로벌 리서치 업체인 딜리전트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나 소액주주운동단체의 표적이 된 국내 기업 수는 지난해 73개로 2020년 10개, 2022년 49개에서 크게 늘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4번째로 많다.

행동주의 펀드들이 최근 들어 더 공격적 활동에 나선 것은 현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의지를 밝힌 것과 관련이 깊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이달 발표하겠다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들은 우리 정부의 주가 부양 의지가 확실함을 인지한 뒤 본격 행동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삼양그룹 계열사 삼양패키징은 VIP자산운용으로부터 “자사주를 매입해 주가를 부양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삼양패키징은 2022년 당기순이익 121억원 가운데 118억원을 배당하며 배당성향 97.9%를 기록하는 등 배당에 적극적이었다. 자사주는 1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소각할 자사주가 없으니, 매입해서라도 주가를 부양하라는 논리다. 업계에선 “2021년 주가가 높을 때 들어온 투자자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담배회사 KT&G는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의 공격을 받고 있다. FCP는 KT&G가 1조원 상당의 자사주를 공익재단에 출연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최근 전현직 이사진을 상대로 1조원대 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FCP는 KT&G가 자사주를 기존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고 있다는 주장이지만, KT&G는 “자사주를 통한 배당금으로 각종 사회 공헌 활동을 하고 있는데, 배임죄란 주장은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이 밖에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해 8월부터 KCGI자산운용으로부터 자사주 소각, 감사위원 선임 절차 개선 등을 요구 받아 왔다. 주주제안 마감 시한인 16일까지 추가 요구를 할 가능성도 있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KB·신한·하나·우리·JB·BNK·DGB금융지주 등 7곳에 주주환원 정책을 실적에 맞춰 이행하라는 주주서한을 지난달 발송했다. 권재열 경희대 교수는 “행동주의의 순기능도 있지만, 과도한 요구로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는 프랑스처럼 정부가 ‘백서’를 만들어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며 “또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 측면이 있는 자사주 소각을 요구하려면, 다른 나라처럼 포이즌필, 차등의결권, 황금주 같은 경영권 방어 수단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행동주의 펀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지난달 17일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국내 증시 저평가 문제 해소 대책을 마련하겠다면서 처음 내놓은 용어다. 행동주의 펀드는 단순 투자에서 벗어나 기업 경영에 목소리를 내며 주가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쓴다. 주로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등을 요구하며 단기 차익을 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