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롯데케미칼 전 부서에는 성낙선 최고재무책임자(CFO) 명의로 “올해 투자와 경비 계획의 절감 방안을 마련해 보고해 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작년 10월 정했던 올해 사업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고, 꼭 필요한 투자·지출이 아니면 보류해달라는 요청이다. 롯데케미칼 한 관계자는 “부서별로 예산 절감 방안을 보고하느라 바쁘다”며 “매주 하는 임원회의도 투자 재검토, 경기 전망 분석이 대부분일 정도로 위기의식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 2년간 불황이 이어진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올해 반등은커녕 구조적 장기 불황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중국이 자급률을 높이고 수출까지 늘리기 위해 공격적으로 설비를 확장하는 가운데, ‘탈(脫)석유’를 외치는 중동 국가까지 석유화학 산업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화학제품은 2021년 코로나 특수로 반도체를 제치고 우리 수출 1위를 차지했고, 작년 기준으로도 반도체·자동차·석유제품에 이어 넷째로 비중이 큰 수출 품목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최근의 고비를 넘기려면, 과거 일본처럼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국 이어 중동까지 공세

그동안 한국 석화업계의 주된 위협은 중국이었다. 중국이 대규모 증설로 자급률을 높이고 수출에 나서면서, 중국을 최대 수출시장으로 삼던 한국 석화업체들은 주요 시장에서 중국과 수출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최근 5년간 2배로 늘어, 지난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5000만t을 돌파했다. 현재 설비 가동률은 80% 수준인데도, 내수 시장에서 제품이 남아돌아 동남아 등에 수출하고 있다. 한국 제품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거의 없다.

그래픽=양진경

여기에 중동 국가들은 ‘석유에서 화학으로(oil to chemical)’ 전략을 내세우며 정유뿐 아니라 석유화학에 눈을 돌리고 있다. 원유를 정제하면 휘발유·경유·등유와 함께 화학제품 원료인 나프타가 나오는데, 이 나프타를 팔지 않고 직접 크래킹(분해)해 싼값에 에틸렌·프로필렌 같은 기초유분을 만들려고 나서는 것이다. 탈탄소 흐름으로 석유사업이 사양화되자,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수직계열화 전략이다.

가장 공격적인 곳은 사우디 국영석유사 아람코다. 2017년 중동 최대 석유화학회사 사빅(SABIC)을 80조원에 인수한 아람코는 이듬해 ‘화학산업’에 향후 10년간 1000억달러(약 132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현재까지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50조원 이상의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선 울산에 9조원을 쏟아붓는 ‘샤힌 프로젝트’를 진행 중으로, 공장이 2026년 완공되면 180만t의 에틸렌을 포함해 총 305만t의 기초유분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다. 국내 에틸렌 생산 능력은 작년 기준 1280만t(LG화학 330만t, 롯데케미칼 233만t 등)으로 현재의 공급 과잉이 심화할 수 있다.

아람코가 중국 주요 석유화학 기업과 상호 지분 투자를 하며 중국과 밀월 관계를 강화하는 것도 위협적이다. 아람코는 2022년 12월 중국 최대 석유기업 시노펙과 13조원을 투자하는 ‘푸젠성 구레이 2기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약 40조원에 달하는 석유화학 투자를 진행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원유를 직접 조달하는 중동 정유사들은 원가 경쟁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며 “누가 오래 버티느냐의 ‘치킨게임’에서 한국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국내 NCC 공장 가동률 70%대… 적자 늪 벗어날 길은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여수·울산·대산 등 국내 주요 석유화학 단지의 NCC(나프타크래킹센터) 공장 평균 가동률은 올 들어 74% 안팎에 머물러 있다. 김평중 석화협회 본부장은 “가동률 70%는 공장 가동을 위한 마지노선”이라며 “계약 물량 때문에 공장을 돌리고는 있지만, 80달러의 높은 국제유가로 원가는 높은데 수요는 부진해 돌릴수록 적자가 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화학업체들도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LG화학은 범용제품 사업의 물적 분할을 통해 일부 지분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중국 내 범용 제품 공장을 모두 매각한 데 이어 말레이시아 법인 ‘타이탄’도 매각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업계에선 “매각이 안 되거나, 헐값에 매각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석유화학이 무너지는 것은 그 근간인 정유 산업까지 무너진다는 것을 뜻한다”며 “정부가 정유·화학 산업 생태계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간산업을 지키기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