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의 최고 경영협의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이하 수펙스)를 이끄는 최창원<사진> 의장의 요즘 최대 화두는 ‘리어레인지(rearrange)’다. 될 사업과 안 될 사업을 가려내는 사업 구조 개편이다. 최 의장은 올 초 의장 취임 때도 100여 명 임직원에게 “전기차, 수소는 가까운 미래라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오고 있고, AI(인공지능)는 먼 미래라 생각했는데 이미 우리 눈앞에 와 있다. 리어레인지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동안 그룹이 투자해온 신사업이 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려면, 사업별 투자 규모와 속도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 의장 말대로 SK그룹이 사업 구조 개편에 착수했다. 12일 재계에 따르면, SK그룹은 20년 만에 부활해 지난달부터 격주로 열리는 토요 사장단 회의를 통해 사업 구조 개편 작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먼저 ‘배터리 밸류체인(공급망)’ ‘수소 밸류체인’ ‘AI 밸류체인’ 등 주요 사업의 밸류체인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주요 계열사 CEO급이 TF 장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중복 투자된 부분은 없는지, 정리해야 할 사업은 무엇인지, 효율적으로 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선 어떤 투자가 더 필요한지 들여다보고 있다. 특히 지난 6~7년간 진행한 그룹의 주요 투자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오래전부터 유지해온 사업이라도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과감히 정리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분야별로 필요한 과제 수행을 위해 외부 컨설팅 회사 자문도 받고 있다.

그래픽=양인성

SK가 미래 먹거리로 삼고 과감히 투자해온 배터리·수소 사업은 정체기를 맞거나 산업 생태계 조성이 늦어지고 있다. 배터리 사업을 하는 SK온은 흑자 전환 시기가 계속 늦춰지고, 배터리 재고 증가로 미국 신규 공장 가동 시점을 늦추거나 기존 공장 생산량을 줄이고 있다. SK E&S가 주도하는 수소 사업도 전체 생태계 조성이 더뎌 단기간 내 수익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반면 미국 오픈AI가 촉발한 생성형 AI 시장은 급성장하며 글로벌 빅테크들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SK그룹은 SK텔레콤과 SK하이닉스가 주축이 돼 AI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수소와 배터리는 속도를 조절하는 한편, 비주력인 유통 부문은 과감하게 정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며 “바이오를 비롯해 유망한 신사업 투자도 적극적으로 발굴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의장은 다만 “SK의 투자 DNA는 그룹 혁신을 이끌어온 원동력”이라며 “투자를 줄이자는 게 아니라, 재조정하고 더 좋은 것을 찾자는 것”이라고 임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벤처기업 지분 투자 등이 당장 평가 손실이 났다는 이유로 대거 매각하는 식의 구조 조정에 나서진 않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