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양진경

108년 역사의 세계 최대 항공기 제조사인 미국 보잉(Boeing)이 위기에 처했다. 올 들어서만 5000m 상공을 날던 비행기에 냉장고만 한 구멍이 뚫리고, 이륙 도중 엔진 덮개가 떨어져 나가는 사고가 잇따랐다. 올해만 보잉 주가는 30% 넘게 떨어졌다. 1970년 유럽 국가들이 참여해 설립한 에어버스에 시가총액, 인도량, 주문량에서 모두 밀리고 있다. 미국 현지 언론들은 기술자를 가장 우대해온 ‘엔지니어의 회사’였던 보잉이 ‘숫자(실적)만 좇는 회사’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보잉을 세계 최대 항공기 제작사로 만든 엔지니어들이 배제되고, 재무 전문가들이 경영을 맡으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항공기 제조의 핵심 경쟁력은 기술력과 안전이 가장 큰 무기인데도 이런 부분을 소홀히 하면서 회사 경영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지적이다.

◇비행 도중 구멍, 이륙 때 엔진 덮개 떨어져

미국 시사 주간지 디 애틀랜틱은 “보잉은 한때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였다”며 “특히 안전과 완벽함에서 최고의 명성을 가졌다”고 했다. 보잉은 여전히 ‘보잉이 아니라면 나는 가지 않겠다(If it’s not Boeing, I’m not going)’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티셔츠와 컵 등을 팔고 있다.

2018년 인도네시아, 2019년 에티오피아에서 보잉이 만든 항공기가 추락해 346명이 사망했다. 이후 보잉은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하는 등 절치부심하는 모습이었지만, 올해 들어 또다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시작은 지난 1월 미국 포틀랜드 국제공항을 이륙한 알래스카항공 보잉 737 맥스9 여객기가 5000m 상공을 비행하던 중 창문과 벽체 일부가 뜯겨 나가면서 비상착륙하는 사고였다.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의 예비조사 결과, 비행기를 조립할 때 문을 고정하는 볼트 4개가 빠진 것으로 파악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륙 준비 중이던 비행기의 앞바퀴가 떨어져 나가고, 객실에서 연기가 감지돼 회항하는 일도 벌어졌다. 지난 7일에는 미국 사우스웨스트항공 소속 보잉 737-800 여객기가 이륙 도중 엔진 덮개가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해 회항했다.

그래픽=양진경

잇따른 사고로 미국연방항공청(FAA) 조사를 받는 보잉은 직원의 폭로도 맞닥뜨리게 됐다. 보잉 엔지니어가 보잉 여객기 787드림라이너의 동체가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수천 번의 운항 뒤에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FAA에 문건을 보낸 것이다.

◇시총·주문량·인도량 모두 후발 주자 에어버스에 밀려

보잉은 후발 주자인 경쟁사 에어버스에 밀리고 있다. 1분기 보잉의 항공기 인도량은 83대로 직전 분기(157대)는 물론 전년 동기(130대)에 비해서도 크게 감소했다. 반면 에어버스는 1분기 142대를 인도했다. 3월 주문량만 보면 보잉은 113대인데, 에어버스는 137대다. 지난 1월 2일 251.76달러(약 34만8688원)였던 보잉 주가는 16일 170.55달러(약 23만6212원)로 33% 떨어졌다. 반면 같은 기간 에어버스 주가는 13% 가까이 올랐다. 보잉의 시총은 약 144조원으로 에어버스(188조원)보다 44조원 적다.

그래픽=양진경

국내 항공업계에서도 두 회사를 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 지난달 21일 대한항공은 에어버스 항공기 33대를 구매한다고 밝혔다. 137억달러에 달하는 계약으로, 17일 환율을 적용하면 약 18조9745억원 규모다. 현재 대한항공은 137대의 여객기 가운데 보잉 81대, 에어버스 56대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통상 보잉과 에어버스 비율을 6대4로 가져왔는데, 대한항공 내부에선 “창사 이래 처음으로 10년 안에 보잉과 에어버스의 비율이 역전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여객기 70대 중 보잉은 11대뿐이고, 나머지 59대는 에어버스 기종이다.

◇실종된 엔지니어의 회사

미국 언론들은 보잉의 위기를 사내 문화에서 찾는다. 뉴욕타임스는 “안전을 가장 우선시하는 엔지니어 중심의 회사였던 보잉이 완벽주의보다 수익성을 추구하는 문화로 바뀐 게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도했다. 보잉의 위기가 20년 넘는 동안 천천히 진행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잉이 지난 1997년 경쟁사인 맥도널 더글라스를 인수·합병한 후 엔지니어의 회사에서 숫자를 좇는 회사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2020년 보잉 회장 겸 CEO가 된 데이브 캘훈 역시 엔지니어 경력 없이 투자회사와 GE 등에 몸담은 재무 전문가다. 지난달 25일 캘훈 회장은 연말쯤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보잉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무리하게 아웃소싱을 확대한 게 안전 문제를 불러왔다는 지적도 나온다. 디 애틀랜틱은 “보잉은 주로 조립을 담당하고, 아웃소싱하는 부품을 계속해서 늘렸다”며 “737 맥스 기종의 경우 50만 개 넘는 부품이 들어가는데, 보잉은 600개가 넘는 회사로부터 부품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잉은 또 비용 절감을 내세우며 잇따라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지난 2022년 경험이 많은 엔지니어 수백 명이 정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보잉에서 퇴사하기도 했다. 보잉의 가장 큰 고객사인 에미레이트항공의 팀 클라크 회장은 “시간은 보잉의 편이 아니다”라며 “보잉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엔지니어 경력이 있는 수장을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