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선사(船社) 다이나콤은 최근 2년간 유조선(탱커)만 약 40척을 주문한 해운업계 ‘큰손’이다. 그런데 이달 중순 다이나콤의 ‘유조선 2척’ 계약 소식이 유독 더 주목을 받았다. 다이나콤이 작년 9월 한 기업이 중국 헝리조선소에 주문한 30만6000t급 유조선 2척을 각각 약 1억2000만달러(약 1652억원)에 넘겨받는 리세일(Resale)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리세일은 선박 중고 거래 중 하나로 신조(新造) 중인 선박을 다른 선주(船主)에 매각하는 것으로, 해당 선종의 선박 수요가 높을 때 이뤄진다. 앞으로 유조선이 더 비싸질 게 분명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미리 선점한다는 의미다. 업계에선 “다이나콤이 리세일 시장에 뛰어든 건 10년 만”이라고 했다.
유조선 가격이 1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15만DWT(중량 톤수) 이상의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품귀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탄소 규제 강화에 따라 석유 사용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며 원유 운반선 발주는 줄었는데 오히려 세계 석유 사용량은 더 늘고 있고, 유조선 폐선 주기(약 30년)가 맞물려 유조선 부족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요 조선사들은 유조선 외에도 다양한 선박 주문이 몰려 있어 지금 주문을 해도 약 3년 뒤에나 선박을 인도받을 수 있어, 중고 유조선 선점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다.
◇유조선 ‘큰손’들, 중고 유조선 선점 경쟁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 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VLCC 중 선령 5년·31만DWT급 중고 유조선 가격은 연초 대비 8% 오른 1억1300만달러 수준이다. 지난 2월 거래된 30만DWT급 에코 시(Eco Seas)호는 9850만달러에 거래됐는데, 2016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받은 선박 가격 9700만달러보다 오히려 비싸졌다.
최근 몇 년간 유조선 시장은 주춤했다. 바다 위에서도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 규제가 강화되면서 폐선 시점이 당겨질 수 있는 리스크가 있었고, 화석연료를 나르는 유조선은 이런 부담이 더 컸다. 그런데 전망과 다르게 석유 소비량은 탄소 규제에도 오히려 늘었다. 미국에너지관리청에 따르면, 2020년 석유는 하루 평균 9162만배럴 소비됐는데, 올해는 1억291만배럴, 내년은 1억426만배럴 소비가 예상된다.
이런 흐름 속에 작년 하반기 유조선 시장에서도 반전 신호가 나왔다. 노르웨이 시추업체 시드릴과 원유 탱커사 프론트라인을 운영하는 ‘큰손’ 존 프레드릭센은 작년 10월 평균 선령 5.3년인 중고 VLCC 24척을 약 3조1725억원에 매입했다. 업계에선 “신규 인도 VLCC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향후 2년간 운임 상승세를 자신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홍해 사태 등으로 장거리 운송해야 하는 원유량이 급증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올해 말까지 VLCC 129척이 부족하고, 당장 주문해도 2026년 말에나 인도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韓 조선사, 유조선 꺼리다 수익성 올라 재개
한국 조선사는 2021년에는 VLCC를 29척 수주했지만, 2022~2023년 단 한 척도 수주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부가 선박인 액화천연가스(LNG)선 수주 호황에다가 중국과 VLCC 가격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고 VLCC 가격 상승과 함께 신조선가도 상승하면서 국내 조선 3사도 그간 꺼렸던 VLCC 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VLCC 선박 가격 지수는 2021년 4월 88.63에서 지난 25일 기준 125.63으로 약 41% 급등했다.
한화오션도 지난 2월 VLCC 2척을 3420억원에 수주하며 사업을 재개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최고가 계약이었다. HD한국조선해양도 지난 2월 VLCC 4척을 6880억원에 수주했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VLCC가 LNG 운반선, 암모니아 운반선과 더불어 새로운 고수익 선종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