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전력 수급난이 가시화하고 있다. 우수한 인력과 인프라를 찾아 수도권으로 자금과 기업이 몰리지만, 부실한 전력망은 발목을 잡는다. 탈원전·탈석탄을 내세운 지난 정부의 오판과 외면으로 동해안 등 발전 단지와 수도권을 잇는 전력망 구축은 미뤄졌고, 그 결과는 지금 눈앞에 닥쳤다. 세계 각국은 반도체 공장, 데이터 센터를 위해 전기 확보에 나서지만, 그들과 맞붙어야 할 수도권에선 전기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원전과 석탄 발전소가 몰려 있는 동해안과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 발전 단지가 집중된 호남의 전력 사업자들은 전기를 보내지 못해 답답해한다.
결국 수도권에 새로 짓는 반도체 공장은 석탄 화력보다 30% 이상 단가가 비싼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소를 짓고, 정부는 수도권에는 데이터 센터를 사실상 건설하지 못하도록 법령까지 바꿨다. 동해안의 최신형 석탄 발전소는 구형보다 미세 먼지 등 공해 물질 배출은 절반 아래고, 탄소 배출은 10% 적지만 전기를 보낼 방도가 없어 가동을 중단하고, 대신 수도권 공장들은 더 비싼 LNG 발전이나 공해 물질을 더 많이 배출하는 구형 석탄 발전을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력 수요 폭증하는 수도권
10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 등에 따르면 2050년까지 구축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필요한 전력은 10GW(기가와트)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원전 1기 용량이 1GW라는 점을 감안하면 원전 10기에 이르는 대규모다.
정부는 용인 클러스터에 전력을 공급하고자 우선 2030년부터 3년 동안 차례로 500MW(메가와트) 규모 LNG 발전소를 2기씩 6기 가동하고, 2036년까지 ‘서해안 해저 전력 고속도로’를 건설해 태양광과 풍력 발전 단지가 몰린 호남에서 전기를 실어 나를 계획이다. 신해남에서 서인천까지 430km, 새만금에서 태안을 거쳐 영흥에 이르는 짧은 구간도 190km 바닷길을 잇는 고난도 공사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시각이 많지만, 이 방법 외에 수도권으로 대용량 전기를 실어 나를 대안도 찾기 어렵다.
인공지능(AI) 확산과 함께 도시 인근에서 수요가 급증하는 데이터 센터는 전력난 때문에 앞으로는 수도권에서 신설이 어렵게 됐다. 산업부는 지난해 수도권에 데이터 센터를 지을 땐 환경영향평가 등을 통해 건설을 막을 수 있도록 법령을 바꿨고, 올해 6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2019년 2건, 23MW에 그쳤던 수도권 데이터 센터 신청 용량은 지난해까지 총 95건, 5281MW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5년간 접수된 154건, 9181MW 중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렸다. 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선 인천의 5GW급 영흥석탄화력까지 차례로 폐쇄되면 수도권 수급난이 더 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커진다.
◇비수도권은 전기 남아돌아
수도권은 늘어나는 수요에 허덕이지만, 비수도권에 있는 발전소들은 발전기를 꺼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부닥쳐 있다. 발전소 4곳의 발전기 8기가 가동을 중단한 강릉·동해·삼척 외에도 지난 3월과 4월에는 호남 지역에서 전기가 남아돌자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 발전기 수백MW 규모를 일제히 끄는 일이 일어났다. 국내 태양광 발전소의 이용률이 해외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효율이 가장 좋은 한낮에 강제로 생산을 중단한 것이다. 한 전력 업계 관계자는 “맑은 날씨였던 주말이 더 많았다면 강제 중단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망 문제는 앞으로 원전 등 신규 발전소 건설에도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경북 영덕, 강원 삼척 등 과거 원전 부지로 지정됐던 지역을 중심으로 신규 원전 건설 가능성이 크지만, 이미 이 동해안 지역에서 수요처인 수도권으로 보내는 전력망이 과부하에 걸린 현실에서 신규 원전 건설 때까지 망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박종배 건국대 교수는 “수도권에 새로운 발전소를 짓기도 어렵고, 데이터 센터처럼 대규모 수요가 있는 시설을 발전소 인근으로 옮기기도 쉽지 않다”며 “송전망 건설에 범정부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