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석유 회사가 셰일 석유를 시추하고 있는 모습.
그래픽=백형선

미국 양대 석유·가스 기업 엑손모빌과 셰브론은 지난해 10월 셰일 가스 업체인 파이오니어리소시스와 남미 가이아나 광구를 보유한 헤스를 각각 595억달러(약 81조원), 530억달러(약 72조원)에 인수했다. 이에 뒤질세라 지난 2월 미국 석유 업체 다이아몬드백에너지는 경쟁사인 엔데버에너지리소시스를 260억달러(약 35조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6개월 사이에 미국 석유 기업 3곳이 200조원 가까운 돈을 쏟아부어 몸집 불리기에 나선 것이다. 이 세 기업의 사례만이 아니다. 작년 미국 석유·가스 기업이 인수·합병(M&A)에 투자한 금액만 2340억달러(약 320조원)에 달한다. 셰일 가스 붐이 일어난 2012년 이후 최대 규모다. 지난해 국내 500대 기업이 M&A에 투자한 금액(약 15조원)의 20배가 넘는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2월엔 영국 하버에너지가 112억달러를 들여 독일 주요 석유·가스 기업 빈터샬을 인수했다.

그래픽=백형선

‘제3의 에너지 골드러시’가 벌어지고 있다. 각국이 석유를 얻기 위해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각축을 벌인 1·2차 세계대전 시기, 셰일 가스 혁명이 일어났던 2010년대 초반에 이어 또다시 글로벌 ‘에너지 공룡’들이 석유·가스를 손에 넣기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화석연료 퇴출에 앞장섰던 영국, 독일마저도 발전소를 건설하겠다 나섰다. ‘전기 먹는 하마’인 전기차, 데이터센터, 인공지능(AI), AI 반도체 등 최첨단 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줄 알았던 석유·가스의 몸값을 높여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업이 사용하는 모든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글로벌 캠페인인 RE100과 탄소 중립 등에 대한 논의는 쑥 들어간 분위기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부터 끄려는 태세다. 엑손모빌은 보고서에서 “2050년에도 세계 에너지의 절반은 석유와 가스”라고 밝혔다.

작년에 2012년 이후 미국 석유·가스 업계에서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이 성사된 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올해 1분기에만 510억달러(약 70조원)의 투자가 추가로 이뤄졌다. 지난 3월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에너지 콘퍼런스 세라위크에서 석유·가스 업계 임원 12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77%는 향후 2년 안에 500억달러(약 68조원) 이상의 거래가 더 발생할 것이라고 답했다.

◇위축됐던 석유·가스 업계 일어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녹색 성장’, ‘탈탄소’ 바람에 유가 하락까지 겹치면서 석유·가스 기업들의 앞날은 암담했다. 머지않아 석유 시장이 절정을 찍고 꺾이는 이른바 ‘피크 오일(Peak Oil)’이 도래할 것이란 전망도 잇따랐다.

하지만 빅오일들은 조용히 금고를 채우며 앞날을 대비했다. 그리고 세계를 에너지 위기로 몰아넣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들의 곳간을 확 늘렸다. 세계 6대 석유·가스 기업이 2022~2023년 거둔 수익은 770조원에 이른다.

‘실탄’을 가득 채운 석유·가스 기업들은 선진국에서도 구전난(求電難·electricity shortage)에 대한 우려가 나오자 위축됐던 과거에서 벗어나 ‘역대급 투자’에 나서고 있다. 미래 에너지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통 큰 베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2020~2022년에만 해도 불확실했던 시장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석유 기업들이 권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떠난 줄 알았던 석유·가스 버스 다시 찾다

전력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면서 한때 ‘떠나간 버스’ 취급을 받았던 가스발전소도 다시 돌아오고 있다. 영국은 지난 3월 5GW(기가와트) 이상 신규 가스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에너지 안보를 두고 도박을 하지 않겠다”면서 가스발전소 건설이 지체된다면, ‘블랙아웃’이 불가피하다고 우려했다.

탈원전·탈석탄을 내세우며 재생에너지 중심의 정책을 펼쳐온 독일 정부도 지난 2월 160억유로(약 23조6000억원) 규모 보조금을 투입해 가스발전소 15~20기(10GW)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원전 가동을 모두 중단하고, 석탄발전소도 퇴출에 나선 상황에서 재생에너지만으로 당장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맞추지 못하자 내놓은 자구책이다.

미국에서는 텍사스주가 지난 2월 1.2GW 규모 가스발전소 건설 계획을 발표한 것을 비롯해 조지아·노스캐롤라이나·버지니아 등의 전력 업체들이 앞으로 15년 동안 가스발전소 수십 개를 건설할 계획을 밝혔다.

전력 수요지 근처에 2~3년이면 건설이 가능한 데다 전기가 필요할 때마다 끄고 켤 수 있는 유연성 등이 가스발전의 ‘귀환’을 이끈 것으로 평가된다. 뉴욕타임스는 “데이터센터는 짓는 데 1년이면 되지만, 재생에너지를 전력망에 연결하기 위해선 5년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골드만삭스는 2030년까지 미국에서 데이터센터 증가에 따라 늘어나는 전기 수요 중 60%를 천연가스가 충당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시 목소리 커지는 석유·가스 업계

구전난에 석유·가스 기업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숨죽이고 있던 업계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셰브론 CEO 마이크 워스는 지난 6일 미국 매체 CNBC와의 인터뷰에서 “데이터센터는 (태양광발전이 안 되는) 일몰 후에도 멈출 수 없다”며 “믿을 수 있는 천연가스로 돌아오게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천연가스의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도 했다.

아람코 CEO 아민 나세르는 그동안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지난 3월 에너지 콘퍼런스 세라위크에 참석한 나세르 CEO는 “석유·가스를 퇴출해야 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며 “현실적으로 전력 수요를 바라보라”고 일갈했다. 대런 우즈 엑손모빌 CEO는 지난해 11월 열린 한 행사에서 “거대 석유 기업을 악당으로 만들고 화석연료 공급을 제한하는 건 개발도상국 수백만 명을 빈곤에 빠뜨릴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