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일 경기도 군포시 안양컨트리클럽. 1935년생으로 이전 한국식 세는 나이로 90세인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4번홀(파3) 티박스에 섰다. 그의 손에는 5번 유틸리티(하이브리드) 클럽이 들려 있었다. 그린 왼쪽에는 벙커가, 우측에는 연못이 있는 홀이다. 김 명예회장이 친 공은 155m 떨어진 홀컵으로 쏙 들어갔다. 김 명예회장의 생애 두 번째 홀인원이었다. 김 명예회장의 홀인원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재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아마추어 골퍼들은 홀인원, 70대 타수 등 저마다 다양한 기록을 골프 버킷 리스트에 올린다. 그중에서도 ‘에이지 슈트(age shoot·18홀 스코어가 자신의 나이와 같거나 적은 것)’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력은 물론 18홀을 모두 돌 수 있는 체력과 골프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 그리고 함께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동반자까지 두루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재계의 골프 실력자로도 꼽히는 김 명예회장은 75세 때 3오버파 75타를 치며 첫 에이지 슈트를 기록했다. 요즘 김 명예회장에겐 에이지 슈트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골프를 즐기는데, 세 번의 라운드 중 한 번꼴로 에이지 슈트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원그룹 관계자는 “전성기 때 안정적인 80대 초반 타수를 기록했는데, 요즘은 나이와 비슷한 90타 안팎을 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최근 드라이버샷 비거리가 180m 정도라고 한다.
맨손으로 큰 기업을 일군 김 명예회장은 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을 타고 3년 만에 국내 최연소 선장이 됐다. 8년간 마도로스 생활을 하며 폭풍을 만나 ‘죽음의 고비’를 넘은 것도 수차례다. 두주불사였던 김 명예회장은 이제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마신다면 소주 한 잔이 전부라고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소식(小食)하고 많이 걷는다. 요즘도 골프를 치러 가면 18홀 중 절반은 카트를 타지 않고 걷는다고 한다.
김 명예회장은 지난 2019년 경영 일선에서 은퇴했다. 14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김 명예회장의 아들 김남정 회장을 동원그룹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했다. 요즘 김 명예회장의 고민은 뭘까. 동원그룹 관계자는 “(김 명예회장은) 나이가 들어서 판단이 희미해지는 것을 가장 걱정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평소 건강을 챙기는 것과 함께 두뇌를 쉬지 않고 움직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평일에는 어김없이 출근해서 주요 신문을 꼼꼼히 읽는다. 신간 경영 서적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김 명예회장이 오가며 만나는 직원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신문 열심히 읽고,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해야 한다.” 이 같은 김 명예회장의 지론에 동원그룹 임원들은 매달 책 1권을 읽고 인사팀에 독후감을 제출해야 한다.
김 명예회장은 2022년 카이스트(KAIST)에서 명예 과학기술학 박사 학위를, 작년에는 한양대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두 학위 모두 ‘인공지능(AI) 인재 양성에 기여한 공로’라는 점이 같았다. 김 명예회장은 일찌감치 동원그룹 임직원들에게 “AI를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19년 동원산업이 한양대에 30억원을 기부해 ‘한양 AI솔루션센터’를 설립했고, 2020년에는 김 명예회장이 카이스트에 사재 500억원을 기부했다. 카이스트 AI 대학원은 ‘김재철AI대학원’으로 명명됐다. 지난 2020년 카이스트 기부 약정식이 열린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정복하는 AI 마도로스를 길러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