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사상 최대인 30조원 규모의 체코 원전 수주를 위해 프랑스와 막판 2파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체코 원전 수주에 성공하면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이후 15년 만에 원자로를 포함, 우리 기술로 만든 ‘한국형 원전’을 수출하게 된다. 유럽 국가에는 처음이다.
체코 정부는 현재 두코바니와 테믈린 지역에 1200메가와트(MW) 규모 원전을 최다 4기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국과 미국, 프랑스가 도전장을 내밀었고, 오는 7월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을 앞둔 지금 남은 경쟁자는 프랑스뿐이다. 2009년 UAE 원전 수주전에서 우리한테 패한 뒤 칼을 갈아온 프랑스와 15년 만의 리턴매치인 셈이다. 1960년대부터 원전을 지어 미국에 이어 둘째로 많은 56기를 가동 중인 프랑스는 원전 강국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런 프랑스에 맞서기 위해 우리 정부·기업 관계자들은 13일(현지 시각) 체코 현지에서 각종 행사를 열고 “바라카 신화를 재연하자”며 막판 총력전을 펼쳤다.
한국 원전 업계는 지난 정부 5년 탈원전 어려움 속에서도 UAE 원전 수주 이후 15년 동안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기술력으로 수주전에 뛰어들었다. UAE 원전 수주 당시 미국 등에서 사 온 일부 핵심 설비를 국산화했고, 안전성도 크게 높였다는 평가다. 국내외에서 원전을 지어 오면서 원전 건설·운영·유지·보수 노하우도 한층 향상됐다. 이종호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 연구위원은 “체코 원전 수주에 성공하면 우리 기술력이 세계 최고라는 점을 인정받는 것”이라며 “최근 전력 수요가 늘어나면서 영국·사우디아라비아·튀르키예 등 많은 나라가 원전을 새로 지으려 하고 있어 수출 기회도 한층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30조원 규모의 체코 원전을 누가 지을지 결정하는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은 오는 7월 중 이뤄질 전망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을 중심으로 한국전력기술 등 원전 공기업, 원자로·증기발생기 같은 주 기기 제작을 맡을 두산에너빌리티 등 민간 기업이 한 팀을 이뤘다. 지난 13일에는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을 비롯해 한수원과 정부 관계자들이 체코 현지에서 막판 수주 지원에 나섰다. 박 회장은 체코 프라하 조핀 궁전에서 열린 ‘두산 파트너십 데이’를 주관했고, 원전 사업 수주 시 제품 공급을 담당할 현지 사업장 두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두산은 수출 1호 UAE 바라카 원전에 주 기기를 성공적으로 공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15년 만에 도전하는 해외 원전 수주에 최대한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
◇15년 만에 수출 도전… 현지 막판 총력전
체코는 그동안 대부분 에너지를 러시아에 의존해 왔다. 석탄 발전 비율도 44%로 높은데, 탈탄소를 위해 2030년까지 석탄 발전 중단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산업 측면에서 유럽 교두보 역할을 해온 체코는 독일·한국 등 완성차 생산 공장이 몰리며 전력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현재 원전 6기를 운영하는 체코 정부는 추가 건설을 통해 에너지 탈(脫)러시아, 탈석탄, 안정적 전력 공급이라는 세 토끼를 잡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체코뿐 아니라 동유럽을 비롯해 유럽 국가 전반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체코 원전은 오는 7월 우선협상대상자를, 연말에 최종 사업자를 선정하고 2029년 착공, 2036년 상업 운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애초 한국·중국·러시아·미국·프랑스 등 5국이 수주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중국·러시아는 안보 문제로 처음부터 입찰에서 배제됐다. 미국 원전 업체인 웨스팅하우스도 법적 구속력 있는 제안서를 내지 못해 탈락함으로써 한국과 프랑스 2파전이 됐다.
◇원전 수요 폭발, 유럽과 중동 등에서 발주 이어져
AI(인공지능)와 데이터센터 급성장, 전기차 전환 등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원전이 새로운 르네상스(부흥기)를 맞았다. 불안정한 신재생에너지로는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전 세계가 원전으로 다시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원전 신흥 강국인 우리나라에 원전 수출 기회가 열릴지 관심이다.
15일 세계원자력협회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 440기 원전이 운영 중이다. 61기가 건설 중이고, 92기는 건설 계획이 확정됐다. 이 밖에도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건설이 추진 중인 원전도 300기 이상이다.
최근 원전 신규 발주가 가장 활발한 지역 중 한 곳이 우리나라가 수출을 추진 중인 유럽이다. 탈원전을 선언하고, 신재생에너지로 100% 전환을 시도했던 다수 유럽국이 원전으로 유턴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에 의존하던 가스 공급이 막히자 에너지 자립이 국가 안보 문제가 됐다. 폴란드·루마니아·슬로베니아·헝가리·튀르키예·영국·스웨덴·네덜란드·핀란드까지 원전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영국은 해상풍력으로 충분한 전력 확보가 어렵다고 보고 지난해 원자력청을 설립했다. 지난 1월엔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의 4배로 늘리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1980년 국민투표로 단계적 탈원전을 선언한 스웨덴도 43년 만인 지난해 “2035년까지 2기, 2045년까지 10기의 원전을 건설하겠다”고 했다. 중동에선 사우디·UAE가 적극적이며, 아프리카·북미(캐나다)로도 원전 건설은 확대되고 있다.
일부 국가는 한국형 원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폴란드는 한수원과 ‘APR1400′ 2기 건설을 협상 중이다. 실제 계약이 이뤄지면 수주 규모가 10조~14조원에 이른다. APR1400은 한국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했고, UAE에 4기를 건설하면서 국제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튀르키예는 북부 지역에 APR1400 4기 건설을 위해 한전과 협상 중이다. 한전은 올해 공동 타당성 조사를 포함한 협력 MOU 체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원전 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미국·프랑스·한국·러시아·중국 정도인데 러시아·중국은 다수 국가가 배제하면서 한국이 더 많은 수주를 노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