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7년 4월 25일 정부가 7광구 개발에 활용할 것으로 알려진 시추선 '머스크 파이오니어' 호. 이 시추선은 국내기술로 제작됐으며 해저 2만피트까지 굴착이 가능하다./연합뉴스

우리나라 자원 개발의 역사는 197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닥친 석유 파동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산유국’으로 대표되는 에너지 자립이란 목표가 생긴 것이었다. 1977년 동력자원부가 신설됐고, 1979년엔 한국석유공사가 설립됐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벗어나겠다는 염원은 1976년 이른바 ‘영일만 석유 소동’을 낳기도 했다. 전 국민이 ‘자원 부국’의 꿈을 꿨지만, 발견됐다던 석유가 암반에 스며든 경유로 확인되며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다.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200km 떨어진 ‘7광구’도 기대는 컸지만, 성과는 못 얻었다. 1970년대 말 유행가가 만들어질 정도로 관심이 쏠렸지만, 1978년 공동개발구역협정을 맺은 일본이 1980년대 중반부터 발을 빼면서 시추 작업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산유국’의 꿈은 2000년대를 눈앞에 둔 1998년에야 이뤄졌다. 울산 남동쪽 해역에서 10번째 시추공까지 실패했던 시추선 두성호가 11번째 시도 끝에 4500만 배럴 규모 동해 가스전을 발견한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95번째로 산유국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2004년부터 2021년까지 석유·가스를 생산했다.

이후 국내에서는 의미 있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지만, 해외에선 크고 작은 성공이 이어졌다. 이 가운데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인터내셔널)의 미얀마 가스전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대우인터는 2006년 미얀마 북서부 해상에서 당시 우리나라 3년치 천연가스 소비량이 매장된 가스광구를 발견했다. 2013년부터 천연가스 판매로 해마다 3000억~4000억원에 이르는 이익을 거두고 있다.

물론 흑역사도 있었다. 각국이 자원 개발에 뛰어들던 2000년대 후반, 이명박 정부는 해외 자원 개발에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고유가 시기에 비싼 돈을 주고 산 유전 등 해외 자산은 ‘셰일 혁명’에 유가가 급락하자, 에너지 공기업들을 부실화하는 원인이 됐다. 이후 정부에서 자원 개발은 ‘적폐’로 낙인찍혔고, 국내외 투자는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