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정부가 ‘밸류업 정책’(주가 부양책)의 일환으로 상법상 ‘이사 충실 의무’ 조항을 개정할 조짐을 보이자 재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상법 382조3항에 따르면, 기업의 이사는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돼있는데, 회사 외에 ‘주주’를 위해야 한다는 규정을 넣어 일반 주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재계는 “주주들의 이해관계가 다 다르고, 소송 남발로 미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가 위축될 것”이라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그래픽=박상훈

이복현 금감원장은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자본시장연구원·증권학회가 주관한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 지배구조’ 세미나에 참석해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는 상법 개정을 논의할 시점이 됐다”며 “쪼개기 상장(물적분할 후 상장)처럼 전체 주주가 아닌 회사나 특정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례가 여전히 빈번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그러면서 “경영 환경이 과도하게 위축될 수 있는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 ‘경영 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한다면 기업에도 큰 제약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경영 판단 원칙은 이사가 선량한 관리자 의무를 다했다면, 회사에 손해를 끼쳤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재계에선 주가 하락에 따른 주주들의 소송 우려 때문에 M&A(인수·합병) 등 미래 투자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단기적으로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현대차의 로봇 투자나, 오리온의 바이오 투자는 개정된 상법하에선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복현 원장이 제시한 ‘경영 판단 원칙’ 명문화에 대해서도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경영 판단이었는지 배임인지는 결국 소송을 통해 따질 수밖에 없을 텐데, 소송당하고 재판받는 입장에선 엄청난 리스크”라고 말했다.

◇‘일반 주주 보호’는 글로벌 스탠더드

이날 세미나는 정부가 추진하려는 상법 개정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발표로 주로 구성됐다. 김우진 서울대 교수는 “그동안 지배주주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 CB(전환사채)·BW(신주인수권부사채)의 저가발행, 상장기업과 개인기업 간 불공정 합병 비율 같은 행위는 경영진이 대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라며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회사법에 이를 규율할 기본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현승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지배주주가 계열사 지분을 활용해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사익을 편취하는 행위가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원인”이라면서 “지배주주 대비 소액주주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이사가 ‘주주의 비례적 이익’에 충실하도록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계 “오리온의 바이오 인수 같은 ‘모험 투자’ 불가능”

하지만 기업들은 이 같은 상법 개정 추진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며 반발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기업이 M&A 같은 투자를 할 때마다 주가는 출렁일 수 있는데, 그때마다 소송에 시달린다면 누가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먼 미래를 내다본 장기 투자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오리온의 바이오 투자가 대표적이다. 오리온은 지난 1월 신약개발업체 리가켐바이오 경영권을 5485억원에 인수한다고 밝힌 뒤 이틀 만에 주가가 23% 급락하고 시가총액이 1조원 증발했다. 10년 뒤를 내다본 투자였지만, 시장은 단기 주가에만 집중했다. 만약 상법이 개정되면, 이 같은 투자를 결정한 이사진은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 위반으로 소송을 당할 수 있다.

주주들의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일률적으로 대우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온다. 진성훈 코스닥협회 연구정책그룹장은 “코스닥 투자자의 90%는 개인 투자자이고, 2개월에 한 번씩 주주가 바뀔 정도로 단기 투자자가 많다”며 “이런 주주들의 각각의 이익을 어떻게 보호할지 난감하다”고 말했다.

유정주 한경협 팀장은 “오너 일가의 사익 편취나 쪼개기 상장에 대한 규제는 이미 충분히 마련돼있다”며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방안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해소하고 소신 있는 투자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재열 경희대 교수는 “우리 상법은 이사와 회사가 계약 관계라는 기본 전제하에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주주가 끼어들면 상법 체계 전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며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이사 충실 의무

기업에서 주요 경영 판단 권한을 위임받은 이사는 회사를 위해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상법상 의무. 그러나 국내 기업 이사들이 회사를 위한다면서 대주주 이익을 우선시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발생했다는 논란이 일었고, ‘일반 주주’에게도 충실하도록 하는 상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