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14일 전격적으로 ‘배임죄 폐지’를 주장한 것은 정부의 ‘상법 개정’ 추진에 반대하는 재계를 설득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으로 법이 개정될 경우, 회사 경영진이나 오너를 대상으로 한 배임 소송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소액주주들도 “기업의 잘못된 의사 결정으로 회사가 피해를 보고, 주가가 하락했다”며 경영진을 고발할 수 있다. “상법 개정으로 기업의 경영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이 원장이 대안으로 내놓은 카드가 배임죄 폐지다.
◇상법 개정되면 소송 막기 어려워
이 원장이 처음부터 배임죄 폐지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 12일 열린 세미나에서 “(상법 개정으로) 경영 환경이 과도하게 위축될 수 있는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 ‘경영 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한다면 기업에도 큰 제약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경영 판단의 원칙이란 1829년 미국 루이지애나 대법원 판결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사가 선량한 관리자 의무를 다했다면 회사에 손해를 끼쳤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 원장은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 경영 판단을 했다면 민형사적으로 면책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재계는 “경영 판단의 원칙이 있어도 소송을 막기 어렵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경영 판단의 원칙은 법정에서 기업의 승소 가능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상법 개정으로 소송 자체가 급증하는 현상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 주장대로 상법을 개정하고 나면 아무리 강력한 경영 판단 원칙을 만든다 해도 기업은 소송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미국·영국은 배임죄 처벌 규정 없어
이 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업무상 배임 등으로 기소했던 검사 시절과 입장이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당시에도 배임죄의 모호성과 과도한 처벌 수위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았다”며 “오히려 배임죄 기소를 제일 많이 해 본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재계의 숙원이던 ‘배임죄 처벌 완화 및 폐지’를 강력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배임죄를 과도하게 처벌하는 편이다. 우리나라는 형법상 일반·업무상 배임죄가 있는데 회사법상 특별 배임죄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 규정도 따로 두고 있다. 특경가법은 형법상 배임죄를 가중 처벌하는 역할을 하는데, 50억원 이상 범죄에 대한 형량이 5년 이상 무기징역 이하로 살인죄와 비슷한 수준이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배임죄 처벌 규정이 없다. ‘배임’에 해당하는 문제를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사기죄로 법정에서 다룬다. 이 밖에 독일은 형법상 일반 배임죄, 일본은 형법상 일반 배임죄와 회사법상 특별 배임죄만 있다.
◇”페지 어렵다면 처벌 범위라도 좁혀야”
선진국들이 배임죄 규정을 두지 않거나 처벌 수위를 낮게 정한 것은 폐해가 크기 때문이다. 배임 판단 기준이 불분명해서 기업 활동을 억압한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한 금융 전문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글로벌 투자은행(IB)이 발달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담보를 잡지 않고 대출이나 투자를 하면 배임죄로 처벌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검찰이 기업을 수사할 때 배임죄를 악용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배임죄를 폐지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재벌 편들어주기’란 비판 때문이다. 이 원장은 “배임죄를 없애기 어렵다면 정말 나쁜 짓을 했을 때만 처벌을 받게끔 법에 문구를 추가하거나 회사법상 특별 배임죄라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특별 배임죄를 없애도 형법상 배임죄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배임죄 처벌을 단계적으로 줄여가자는 의미다.
재계는 “배임죄 폐지는 환영하지만, 상법 개정은 별개의 문제”라는 입장이다. 송승혁 대한상공회의소 금융산업팀장은 “이사의 충실 의무를 확대하면 이사의 민사적 손해배상책임의 여지가 늘어나는 만큼 배임죄 폐지만으로 이사회의 소극적·보수적 의사 결정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