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더현대 서울 4층. 골프, 아웃도어 브랜드가 즐비한 이곳에 전동 공구, 안전모, 측량 도구 등 공사장에서 볼 수 있는 용품들이 놓여 있다. 그 곁에선 마네킹이 보안경을 쓰고 줄자, 스패너 등으로 가득 찬 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백화점과 도통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풍경이지만, 패션 기업 코오롱FnC가 2020년 만든 작업복 브랜드 ‘볼디스트’ 매장이다.
작업복이 백화점까지 진출했다. 철저하게 현장 근로자를 겨냥해 브랜드를 만들었는데, 작업자들은 물론 MZ세대들이 일상복으로 작업복에 열광하면서 백화점의 문턱도 넘은 것이다. 기존 작업복 제조 업체에 더해 아웃도어 업체도 작업복 시장에 뛰어들고, 한 철강 업체는 직원들을 위해 작업복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자 작업복을 신사업으로 여기고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글로벌 패션 업계에서는 워크웨어(workwear)로 부르는 작업복이 ‘메가 트렌드’가 됐다는 말이 나온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스카이퀘스트는 2022년 23조2252억원 규모였던 세계 워크웨어 시장이 2031년 38조5749억원으로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작업복이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침체된 의류 시장 속 이례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젊은 블루칼라, 기능성에 패션까지 원해
과거 작업복이라고 하면 회사에서 단체로 맞춰서 나눠주는 게 전부였다. 일반 점퍼의 가슴팍에 회사 이름을 새기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요즘 작업복은 과거와 비교를 거부한다. 코오롱FnC의 볼디스트는 자동차, 오토바이를 정비하는 사람, 건축 현장 작업자, 용접 분야 작업자를 위한 라인 등으로 세분했다. 방탄복, 광케이블 등에 주로 사용하며 불에 잘 타지 않는 소재(헤라크론), 강한 내구성과 상대적으로 가벼운 특성으로 작업 시 찢어짐과 마찰로 인한 손상을 방지하는 소재(코듀라)를 사용하는 식이다. 용접 작업복에는 타들어가지 않고 검게 그을리며 신체를 보호하는 난연 원단을 사용한다. 코오롱FnC 관계자는 “각 산업 분야의 실제 작업자들과 함께 상품을 연구 개발했다”고 말했다.
작업복 시장이 커지면서 기존 유니폼 생산 기업의 표정도 밝다. 형지엘리트는 대기업에 단체 유니폼을 제작·납품해온 경험을 활용해 작업복 브랜드 ‘윌비’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기업체 유니폼 등을 포함한 형지엘리트의 B2B(기업 간 거래) 사업 매출은 2021년 7월~2022년 6월 81억원에서 2022년 7월~2023년 6월 340억원이 돼 4배 이상으로 뛰었다. 형지엘리트는 기존에는 B2B 사업에 치중해왔지만, 올해부터는 홈페이지를 재정비하고 일반 고객에게 직접 작업복을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형지엘리트는 B2B 시장을 겨냥해 영화배우 주진모를 모델로 기용해서 마케팅을 하고 있다.
◇패션 업체는 물론 아웃도어 업체, 철강 업체도 작업복 브랜드에 뛰어들어
업계에서는 시대 변화가 작업복의 인기를 불러왔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코오롱FnC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과 비교해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젊은 블루칼라가 많아요. 그들은 안전을 위한 기능성에 더해 미적인 부분도 중요하게 생각하죠.“ 산업 전반에 재해 예방과 안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도 작업복 수요를 끌어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그쳤다면 작업복은 메가 트렌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작업복의 외관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지만, 기능성과 투박한 멋을 가진 작업복이 새로운 것을 좇는 MZ세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는 분석이 더해진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등이 올해 워크웨어를 표방한 제품을 대거 내놓은 이유다. LF 관계자는 “현재 패션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패션 키워드가 ‘워크웨어’”라며 “워크웨어는 기능적으로 뛰어난 데다 특정 성별에 국한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패션을 추구하는 20~30대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LF 대표 브랜드 헤지스는 서울 망원동 카페(비전 스트롤)와 손잡고 바리스타용 작업복을 내놓기도 했다.
기업들은 작업복 트렌드에 편승하고 있다. 아웃도어로 잘 알려진 케이투코리아그룹은 ‘아이더세이프티’라는 브랜드로 작업복 시장에 뛰어들었다. 작업복뿐 아니라 안전화, 장갑 등도 판다. 철강 업체 대한제강은 ‘아커드’라는 브랜드로 작업복 시장에 등장했다. 직원들에게 더 나은 작업복을 선사하기 위해 사내 프로젝트로 작업복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자 브랜드를 만들고 외부 시장에도 진출한 것이다. 아커드는 올해 서울 충무로에 브랜드 쇼룸도 만들었다. 아커드 관계자는 “작업복 제작의 80% 정도가 외부 기업용”이라며 “일부 제품을 홈페이지에서 판매하고 있는데 인스타그램 등으로 젊은 사람들이 문의하는 경우가 많아 놀랍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