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은 한화시스템과 한화오션을 통해 미국 필라델피아주 소재 필리 조선소 지분 100%를 인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필리 조선소 전경. /한화그룹

국내 조선·방산업계가 미국 조선소를 처음으로 인수하고 현지에서 선박 제작에 나선다. 이번에 한국 기업이 1억달러(약 1380억원)에 인수한 미 조선소는 현재 약 1550명이 일하고, 1997년 이후 미국에서 건조한 대형 상선의 50%를 책임진 곳이다. 미국 최대 규모인 길이 330m, 너비 45m 독(dock) 2개를 보유하고 있다. 작년 매출은 약 4억1800만달러(약 5800억원)다. 규모를 감안하면 1억달러는 비교적 싼값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최근 6년간 적자가 이어진 건 변수다. 인력난과 기술 노하우 부족으로 생산 능력이 급감해 시장에 매물로 나온 상황이었다.

그래픽=송윤혜

과거 한국 조선사들이 저렴한 인건비 등을 고려해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에 진출한 적은 있지만 미국에 생산 거점을 확보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상선 시장 확대뿐 아니라 선진 방산국인 미국, 캐나다의 군함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화그룹은 지난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필리 조선소 지분 100%를 1억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21일 밝혔다. 조선·방산 시너지를 위해 계열사 중 한화오션(조선)과 한화시스템(방산)이 인수에 참여한다. 필리 조선소는 1997년 미 해군 국영 조선소 부지에 설립돼 현재는 노르웨이 에너지 기업 아커사(社)의 미국 자회사다. ‘미국 연안을 오가는 선박은 미국에서 건조돼야 한다’는 미국 존스법(Jones Act)에 따라 본토 연안에서 운항하는 상선을 건조해 왔고, 1997년 이후 미국에서 건조된 대형 상선의 약 50%를 공급했다. 상선뿐 아니라 미 교통부의 대형 다목적 훈련함, 해상 풍력 설치선 등 다양한 선박을 건조했다.

이번 인수는 북미에서 생산 ‘거점’이 필요했던 한국 조선소, 인력난과 기술 부족으로 생산 경쟁력이 떨어진 미국 조선소의 이해관계가 맞았다. 미국 조선소들은 존스법에 따라 사실상 경쟁 없이 나눠 가진 건조 물량에 의존하다가 기술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졌다. 최근 베이비부머 은퇴에 따른 인력난까지 맞물려 납기 지연은 일상이 됐다.

한화오션 등 한국 조선사는 북미 시장에서 점진적으로 3단계에 나눠 사업 확장을 기대하고 있다. 우선 앞선 제조 기술을 전수해 미국 조선소의 원가 경쟁력을 높여 현지 상선 수주를 확대할 수 있다. 이후 핵잠수함 등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선박을 만들고 수리하는 인프라가 부족한 미 해군을 상대로 군함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을 확장한다. MRO 사업이 안착하면 이 실적을 바탕으로, 미 군함과 약 60조원대 캐나다 잠수함 사업 등 북미 시장에서 군함까지 수주하는 게 목표다.

선결 과제로 현지 조선소 확보가 필수였고,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이 경쟁했는데 이번 인수로 한화가 우선 거점을 확보했다. 다만, 군함 사업을 위해선 미 정부의 추가 허가가 필요하다. 한화는 인수를 완료한 뒤 허가 획득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현지 반응도 우호적이다. 카를로스 델 토로 미국 해군성 장관은 21일 현지 언론에 “한화의 필리 조선소 인수는 미국의 해양 전략에서 획기적인 이정표”라며 “미국 조선업의 경쟁 환경을 바꿀 것이고, 미국에 진출하는 한국 조선소는 한화가 끝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