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양인성

페트병 겉포장에 인기 캐릭터를 그려 넣은 생수. 병 디자인에 파도 모양을 새긴 탄산음료.

이달 들어 제주삼다수와 코카콜라가 ‘여름 한정판’이라며 출시한 제품이다. 내용물은 달라진 게 없다. 이들 제품 외에도 화장품, 담배, 골프 클럽 등 품목을 가리지 않고 한정판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업과 소비자들 사이에서 “한정판 홍수 시대”라는 말이 나온다. A편의점의 경우 올해 상반기 출시된 한정판 제품이 100여 종에 달한다. B편의점 관계자는 “매주 1~2개의 한정판 제품이 새로 진열된다”고 했다. 유통 기업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신제품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소비자 눈길을 잡으려면 한정판 마케팅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희소성 높고, 소장 가치가 있는 한정판에 열광했던 소비자들은 어느새 상술로 전락한 한정판 마케팅에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기업들이 혁신적인 제품은 만들지 않고, 포장만 바꾸는 등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픽=양인성

◇희소성, 소장 가치 잃은 한정판

한정판 마케팅은 기업이 상품 판매로 이윤을 남기기보다는 충성도 높은 고객이나 마니아 층이 한정판 제품을 소비하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는 측면이 컸다. 명품 가방, 시계, 운동화, 자동차 기업들이 공을 들여 가치를 높인 한정판을 내놓았다. 한정판 제품을 소유하기 위해 소비자들은 밤을 새워서 긴 줄을 섰다. 일단 사고 나면 남들의 부러움과 자기 만족을 얻는 걸 넘어 ‘수익’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이른바 ‘한정판 제품 리셀(되팔기)’ 시장이 생기고, 한정판 제품만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플랫폼까지 등장했다. 나이키가 내놓은 한정판 운동화는 발매가 대비 20배 넘는 가격에 팔리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정판 마케팅이 희소성과 소장 가치를 모두 잃고 ‘흔한 상술’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달 스포츠 브랜드 배럴과 협업한 트레비를 3개월간 한정 판매한다고 밝혔다. 농심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와 손잡고 생수 백산수 라벨에 미키 마우스 같은 디즈니 캐릭터를 넣은 한정판 제품을 선보였다. 모두 겉포장만 살짝 다를 뿐 내용물은 기존 제품과 똑같다.

너도나도 한정판 제품을 내놓다 보니 다 팔리지도 않는 한정판 제품도 생겨난다. 팔도는 지난 2월 ‘팔도비빔면 봄에디션’을 200만개 한정 출시한다고 밝혔다. 봄을 겨냥해 만든 제품인데 2일 현재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 정관장은 작년 11월 “창업 124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존중을 담았다”며 ‘홍삼정 헤리티지 에디션’을 한정판으로 출시했다. 출시 후 7개월이 넘게 지났지만, 정관장 공식 홈페이지와 인터넷 쇼핑몰에서 살 수 있다.

◇피로감 느끼는 소비자들

한정판 홍수에 소비자들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한정판 운동화 수집이 취미인 이모(41)씨는 “기업들이 소비자 지갑을 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한정판이라는 말만 앞세운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정판 제품 출시를 보도한 뉴스의 댓글 창에선 “한정판 별거 아니에요. 포장만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요” “소비자를 호구로 아네요” 같은 반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업들은 소비자의 구매욕을 최대한 끌어올려 지갑을 열게 하고 매출을 올리는 데 한정판 마케팅만 한 전략이 없다고 말한다. 최근 한정판 음료를 출시한 업체 관계자는 “예전에는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내세우기만 해도 효과적인 마케팅이 됐지만, 요즘은 소비자에게 브랜드와 제품을 각인시키려면 한정판처럼 눈길을 끄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정판 제품이 일시적으로 소비자의 관심을 끌고 단기 매출을 높일 수는 있지만, 기업 이미지 손상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나이키는 최근 시장의 예측에 훨씬 못 미치는 실적을 발표했다. 해외 전문가들은 나이키가 혁신적인 신제품을 내놓는 대신 한정판 운동화 등의 사업에 주력한 것을 실적 부진의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